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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민 Nov 04. 2019

라이프 플랫폼 시대…  
‘방문판매원’의 물류 경쟁력


오늘 이야기, 새벽부터 달밤 배송까지 방문판매원의 변신

다음 이야기, 신유통 채널과 한국형 라스트마일 딜리버리에 대한 관찰



어릴 적, 그러니까 35년 전 필자가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4~5학년이었을 때의 일이다. 방과 후, 우리 집 안방 문을 열면 ‘괴기한’ 풍경에 여러번 놀라곤 했다. 서너 명이 얼굴에 하얀 천을 덮은 채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나란히 누워있는 게 아닌가. 안방 문고리를 꽉 쥔 채 얼음이 된 필자를 향해 누워있던 한분이 한 손을 흔들며 말문을 연다.


“아드 와어? 어마 지음 바으니가. 배고브미언 시따위 방머거.” (문제)


때마침 얼굴을 덮은 흰 천 위로 노란색 크림('달걀노른자'로 추정)이 도포되자 발음은 더 어눌해졌다. 그게 웃겼던지 함께 누워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너도나도 ‘키드득 키드득’ 웃음소리가 흰 천 밑으로 새어 나왔다. 마치 외계인의 언어처럼 정체불명의 대화가 순간 방안을 가득 채워졌다. 필자는 그 대화가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울 엄마와 아래층 상훈이, 앞동 수현이, 옆 동 상수네 엄마 등 동네 아주머니들의 낯익은 목소리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들 왔어? 엄마 지금 바쁘니까, 배고프면 식탁 위에 있는 빵 먹어.” (정답)


이웃집 젓가락 수를 차던 그 아줌마

‘아모레’, ‘쥬단학’, ‘쥬리아’, ‘피어리스’, ‘나그랑’, ‘나드리’를 아는가?

1980~1990년대를 주름잡던 국내 화장품 브랜드이다. 아모레 태평양은 현재 아모레퍼시픽, 쥬단학은 한국화장품, 피어리스는 스킨푸드로 명맥을 잇고 있지만 나드리, 나그랑 등은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설명: 초등학생 시절, 한 달에 한두 번쯤 목격할 수 있었던 우리 집 안방의 풍경이다. tvN에서 방영된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중에서 추억의 화장품 방문판매원 모습.


그 시절 화장품 아줌마(방문판매원)는 ‘우리 동네 생생정보통신원’이었다. 우리 집은 물론 이웃집 젓가락 수를 훤히 차던 그 아줌마는 ‘누구네 아빠가 사우디에 일하러 갔다가, 얼마 전 들어오면서 최신 칼라 TV랑 비디오, 오디오 등을 다 바꿨더라’, ‘누구네 엄마가 며칠 안 보여서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곗돈을 들고 튀었다더라’, ‘슈퍼 앞 이층 집 누구네 장롱 안에 두꺼비(황금)가 두 마리 있었는데, 이번에 보니까 세 마리로 늘었더라’ 등등 별의별 정보들이 CNN 라이브보다 더 디테일하게 전달됐다. 같은 동네 살면서 이웃집 누구누구네 정보를 모두 꿰고 있다 보니 당연히 그 지역의 대표적인 마당발(정보통) 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사족이지만 그때 동네 아주머니의 얼굴에 달걀노른자를 친절하게 올려주던 그 화장품 아줌마는 여전히 울 엄마와 잘 지내신다. 두 분이 달라진 건 70대를 앞둔 할머니가 되었다는 것과 그때는 울 엄마에게 화장품만 팔았지만, 지금은 같은 회사의 홍삼 발효액과 건강보조식품 등으로 판매 품목을 늘렸다는 거다.  


라이프 플랫폼 시대의 소매업 변화

‘온라이프(on life)’ 시대라고 한다.

이 용어는 이탈리아 철학자 루치아노 플로디가 처음 사용했다는데, 온라인과 일상적인 삶의 차이가 점점 희미해져 마침내 두 영역의 구분이 사라지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개념을 유통에 접목한 것은 바이난트 용건(네덜란드 온라인 쇼핑 포털 ‘매크로폴리스’ 창립자)이다. 그의 저서 <온라인 쇼핑의 종말>에서 “유통업과 서비스 분야는 앞으로 10년 안에 새로운 경제질서인 온라이프 리테일에 완전히 넘어가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온라이프는 온라인인지 오프라인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시장을 말한다. 쉽게 풀이하면 오프라인 매장에서 물건을 사면 집으로 배송해주고, 온라인에서 상품을 구매하면 오프라인 매장에서 물건을 픽업할 수도 있는 서비스 형태이다.


설명: <온라인 쇼핑의 종말> 저자 바이난트 융건은 온오프라인 소비 체험이 사라지는 온라이프 개념이 향후 10년간 리테일 시장을 지배할 것으로 내다봤다.


필자는 온오프라인 유통 무경계를 뜻하는 ‘옴니채널(omni channel)’온라이프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서경배 아모레 퍼시픽 회장이 온라이프 기업의 정의에 대해 “오프라인 환경에서 강점이 있는 기업이 온라인을 수용해 경계를 무너뜨리면 온라이프 기업이 된다”는 설명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5년여 전 많은 이들이 오프라인 쇼핑 시장의 쇠락을 예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온라인 쇼핑 시장이 그렇게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구분이 무의미한 ‘온라이프(on life) 시대’가 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 서경배 아모레 퍼시픽 회장, 2019년 3월 정기조회에서


서 회장의 말대로라면 오프라인에서 확보한 고객 정보를 온라인에 잘 접목하면 고객 이탈을 줄이고 충성 고객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반대로 온라인의 단점도 오프라인이 보완해 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아마존의 무인매장 아마존 고, 알리바바의 신선식품 매장 허마셴셩 등 온라인 기업이 오프라인 매장에 진출하는 것은 초기형 온라이프 개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 장소, 상품 이동의 최적화, 그리고 '방판 줌마단'

마윈 알리바바 회장은 2016년에 신유통(新流通) 개념을 꺼내면서 “순수한 전자상거래는 밸류체인 전반에 걸쳐 온오프라인, 물류 및 데이터를 통합하는 신유통(소매유통)에 자리를 내주고 전통적인 비즈니스로 축소될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이 말인즉 온오프라인의 경계를 허무는 새로운 형태의 상거래 행위 등장을 말하는데, 앞서 온라이프 리테일의 개념과 맥을 같이한다.


마윈 회장은 신유통에 대해 판매수법과 방법, 마케팅과 물류에 이르는 전 과정을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 최신 ICT 기술과 온오프라인 체험, 현대화된 물류로 융합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필자는 신유통(또는 온라이프 리테일)에 대해 상품의 공급(판매)에 있어 사람과 사람, 장소와 장소 사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동하는 방법을 최적화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필자는 이런 관점에서 최근 아모레의 카운슬러(아모레 아줌마)나 한국야쿠르트의 프레시 매니저(요구르트 아줌마) 등 방문판매사원을 일컫는 ‘방판 줌마단’의 변신을 의미 있게 관찰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아모레퍼시픽의 방판 매출은 연간 1조 7000억 원(2016년 기준)에 이른다. 1964년 등장한 아모레 방판사원은 현재 약 3만여 명이 활동 중이고, 방판으로 화장품을 사는 소비자는 무려 25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최근에는 판매 제품군도 기존 화장품은 물론 홍삼액 등 건강보조식품으로 확대하고 있으며, 고객 관리도 앱 등을 통해 첨단화되고 있다.


설명: 모빌리티 이동수단과 배송 서비스(물류)를 결합한 요구르트 아줌마(프레시 매니저)가 온라이프 리테일 시대에 라스트 마일 딜리버리로 재조명받고 있다.

  

한국야쿠르트는 야쿠르트 아줌마가 몰고 다니는 전동카트(일명 ‘코코’)에 자사 제품뿐만 아니라 김치, 이유식, 소·돼지고기, 채소 등을 싣고 판매한다. 냉장 기능을 갖춘 전국 1만여 대 전동카트 덕분에 신선식품 배송 시장에 진출했다. 올초 ‘야쿠르트 아줌마’의 공식 명칭을 ‘프레시 매니저’로 바꾼 것도 이 시장을 적극 공략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현재 타사 제품 수는 50개, 취급 품목만 212개가 넘는다. 강남 등 서울 3개 구에서는 밤 11시까지 저녁 배송도 시범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이 회사의 간편식 브랜드인 잇츠온은 지난해 선보인 지 1년 만에 200억 원 매출을 기록해 순항 중이다.


화장품과 요구르트, 그리고 녹즙, 정수기 등 각종 렌털을 포함한 다양한 방문판매원들이 라이프 플랫폼 시대에 한국형 라스트마일 딜리버리로 주목 받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 동네 정보를 훤히 꾀찬 지역 영업전문가다.

둘째, 24시간 골목 배송이 가능한 물류 인프라와 유휴 시간을 갖추고 있다.

셋째, 지역의 주민과 장기간 긴밀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다음 글에서는 모빌리티 이동수단과 배송 서비스(물류)를 결합한 야쿠르트 등 라이프 플랫폼 시대에 한국형 라스트마일 딜리버리로 재조명받고 있는 ‘방판 아줌마’들의 물류 경쟁력을 살펴보겠다.


글. 김철민 비욘드엑스 대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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