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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Oct 02. 2022

사랑에 관한 단상

미적분이 사랑이라니...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나의 사랑은 미적분이다.


미적분에서는 이론상 어떤 값이든 절대 0이 될 수 없다(상수 미분은 제외한다). 한없이 가까워지기만 하기 때문에 우리는 0에 ‘수렴’한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아무리 미분하고 미분해도 어떤 성질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걸까(지난 사랑들을 이젠 잊고 극복했다 하더라도 사랑했던 기억만은 영원히 남는 것처럼) 하물며 적분은 어떠한가. 무한으로 발산할 수 있는 적분은 아마 사랑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비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많은 사람이 수학을 하나의 답만이 존재하는 학문이라 생각한다. 교육 과정상 맞는 말이지만, 전부 맞는 말은 아니다. 수학만큼 가능성의 집합인 것도 없기 때문이다(수렴과 발산에 대한 정의가 대표적이다).


왜 자꾸 사랑에 관한 글을 읽느냐는 질문을 예전부터 종종 받곤 한다. 그건 아마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었겠지. 사랑하는(했던?) 당신이 물어보았기 때문이기도. 솔직히 잘 몰라서 알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여기서 사랑은 단순히 이성애적인 것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우정도 명백한 사랑이고, 가족간의 감정도 명백한 사랑이다(지금 그들에게 느끼는 감정이 어떠하건 기반이 사랑이라는 것).


그런 질문을 하는 당신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은 사랑하지 않느냐고. 삶의 공허는 절대 채워낼 수가 없지만, 나같은 인간은 미련하고 또 미련해서 사랑에 대해 사색하고 그를 탐험하며 아직도 그 공허를 채워내기 위해 노력한다. 배부름을 모르는 사람처럼 어떤 사랑도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불안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간다. 어떨 때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지고. 그럴 때면 누군가를 쉽게 미워하게 된다. 그 대상이 본인이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만의 어떤 기둥이 존재해야 한다. 세상의 어떤 고된 풍파에 쓰러질 지라도 붙잡고 견딜 그런 기둥. 누군가나 자신을 끝도 없이 미워하기 보다는 그냥 안을 수 있는 그런 것.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결국엔 그를 잡고 의연하게 일어나서 다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기둥. 우리가 필요한 건 그런 것이다.


아. 다시는 오지 않을 젊은 날들이 지나간다. 그런데 삶이 너무 불안한 거야(불안을 극복하는 다양한 방법을 고민중이다. 불안에 관한 글도 더 수정해서 올릴 계획).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삶을 포기할 생각이 없고. 그렇기에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 나는, 사랑에 대해 탐구하고 최선을 다해 사랑한다. 나의 기둥이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미디어에서 만들어 내는 단편적인 사랑을 넘어 더 깊게 탐구한다. 나는 이성애적인 사랑에서는 설렘을 비롯한 여러 정신적인 혹은 육체적인 쾌락, 순간적이지만 깊은 안정을 느끼고. 우정의 사랑에서는 나라는 존재를 둘러싼 타인의 신뢰와 믿음을 느끼고. 가족간의 사랑에서는 정체성을 느낀다. 셋 모두를 동시에 할 때도, 일부만 할 때도 있는 거 같다.


모든 종류의 사랑을 사랑하는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진부할 수 있는 사랑 얘기를 늘어놓으면서 사랑을 한다. 당신이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사랑은 이미 당신의 삶의 일부이다. 분명 벅차게 힘든 사랑을 할 때도 있었지만 그 어느 때고 사랑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나는 삶을 무어라 정의하지 못한다. 그럴 생각도 없긴 하지만. 다만 삶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 사랑이라는 것을 주장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나의 삶이 그러했고, 당신의 삶이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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