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떠난 뉴욕에서의 하루
토론토에서 태어나고 자라 지금은 밴쿠버에서 거주하고 있는 친구가 오랜만에 가족을 방문하러 토론토에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캐나다에서 가장 큰 도시인 토론토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었고 태생적으로 낮짝이 두꺼운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당장 친구에게 나도 같이 가도 되겠느냐 물었다. 평소 성격이 쿨한 것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한 친구는 흔쾌히도 당연하지! 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토론토에서의 5일, 그리고 장장 5시간을 비행해서 동부까지 가는데 토론토만 보고 오면 아쉬울 것 같아 곁다리 식으로 겸사 겸사 뉴욕에서의 5일을 보내기로 여행 일정을 잡았다.
평소 여행하기 전 어디를 갈건지, 어디에서 묵을 건지 끙끙대며 고민하고, 숙소가 안 정해지면 전전긍긍했었지만 이번은 뉴욕으로 가는 세번째 여행이라 그런지 한결 여유로웠다. 그도 그럴것이, 뉴욕은 워낙 방문자가 많은 도시라 막바지에 숙소를 정해도 늦지 않을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마침 토론토에서 새로 알게 된 친구 커플이 뉴욕에 굉장히 빠삭한 알짜배기 정보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것이 "One Night Standard"라는 사이트다. 'The Standard'라는 미국 뉴욕 하이라인, 이스트 빌리지 및 마이애미 및 L.A. 곳곳에 분점이 있는 호텔에서 만든 웹사이트 인데, 매일 오후 3시에 예약이 안 된 방을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으로 내놓는다. 하지만 당일 예약만 가능하고, 단 이틀 간만 연장할 수 있다. 짧은 일정으로 뉴욕을 여행하게 될 때만 유용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저렴한 가격에 뉴욕 맨하탄 한복판에 있는 부티크 호텔에서 묵을 수 있다는 장점이 대단히 매력적이다. 그래서 토론토를 떠나 뉴욕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바로 직전, 오후 3시가 되자 마자 상당한 떨림을 안고 부킹을 시도한 결과, 맨하탄의 첼시 부근인 하이라인에 위치한 곳의 디럭스 킹 리버 뷰 방을 예약할 수 있었다.
우버를 타고 호텔로 도착하여 체크 인을 마친 다음 날, 호텔 바로 앞에 위치한 다이안 본 퍼스텐버그 (Diane Von Furstenberg)를 둘러보는 것을 시작으로, 뉴욕에 가면 한 번 쯤은 타보고 싶었던 시티 자전거를 대여하여 맨하탄 곳곳을 돌아보기로 마음 먹었다. 호텔 근처의 하이라인 근처에 있는 자전거 대여소에서 시티 자전거를 대여한 후, 씐나게 쌩쌩 달린지 한 5분만에 엄청나게 큰 트럭에 치일 뻔한 헬(Hell)을 경험하였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차츰 시간이 지나가 보니 적응이 되어 허드슨 강 줄기를 따라 안전 운행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다행히도 아무 다친 데 없이 첼시 마켓, 소호, 차이나타운까지 자전거를 타고 열심히 쏘다닐 수 있었다.
언제나 북적북적한 첼시 마켓과 미트패킹 거리(Meatpacking District)를 지나다 보니, 점심 시간이 훨씬 지나있었다. 이 날의 점심은 한국계 미국인이지만 일본식 라멘에 조예가 깊은 뉴욕의 유명한 요리사, 데이비드 창(David Chang)의 모모푸쿠 누들바(Momofuku Noodle Bar) 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소프트하게 끓여낸 달걀에 두꺼운 삽겹살을 구워 얹어 낸 따뜻한 소바를 시켰다. 면이 입으로 들어가는 지 배로 들어가는 지 모르게 빨리 먹어치우고, 모모푸쿠 밀크 바(Momofuku Milk Bar)에서 시리얼로 만든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흡입한 뒤 소호-리틀 이태리로 향했다.
자전거를 타고 소호에 도착한 나는, 한국에서 상륙한 젠틀몬스터 매장을 발견, 캐나다 달러가 미화에 비해 엄청 값이 낮아졌다는 사실을 깜빡한 채,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지름신을 접신하고야 말았다. 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내 손에는 (굳이 한국에서 사도 되는) 한국 브랜드의 선글라스 한 채가 들려있었다. 나중에 신용카드 구매 내역서를 보고 얼마나 한숨을 쉬었는지... (다시는 이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보지만 얼마나 갈지는 미지수다.)
자전거를 타고 다녀서일까. 목에 심한 갈증이 왔다. 다행히도 친절한 뉴욕 사람들은 현지인이 아니면 찾기 어려운 Mr. Fong's 라는 멋진 칵테일 바를 안내해주었다. 껌껌한 외부에 간판도 잘 안 보이는 한 구석에 위치한 이 칵테일 바에는, 왠지 말 걸기 무서운 아저씨 혼자 영업을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도 모르게 운영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마치 사람은 겉 보기로만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재차 확인시켜주기라도 하듯, 이 무서워 보이는 아저씨가 만들어준 칵테일은 상당히 맛이 있었고, 지친 목에 갈증을 풀어주기에 제격이었다.
여행 초반에 예기치 않은 접신(?)을 하게 되어 많은 지출이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순리였을지도 모른다(고 되도 않는 논리를 펼쳐본다.) 따져보면 뉴욕만큼 여행자의 지갑을 얇게 만드는 곳도 없기 때문이다. 미국 최고의 상업적인 도시 답게 곳곳에 자리 잡은 부티끄 상점들, 화려하고 아름다운 인테리어로 눈을 매혹시키는 곳들이 부지기수이다. 그 중에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도버스트릿마켓(Dover Street Market)이었다. 꼼데가르송(COMME des GARÇONS), 구찌(Gucci), 톰브라운(Thom Browne), 제이 더블유 앤더슨(J.W. Anderson), 시몬 로샤(Simone Rocha), 언더커버(Undercover) 부터 잘나가는 베트멍(Vetements), 고샤 루브친스키(Gosha Rubchinskiy)등 여러 디자이너 브랜드들을 1층부터 6층까지 전시 해 놓은 도버스트릿 마켓은 판매를 위한 편집샵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박물관 같았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쇼핑을 하다보니 해는 여느덧 기웃기웃 저물어 가고, 다시 맨하탄 중심가인 Flatiron 빌딩 근처로 돌아왔다. 그리고 처음 뉴욕에 왔을 때 가고 싶었지만 너무 줄이 길어서 그냥 포기했어야 했던 빌딩 꼭대기에 있는 루프탑 바 230 5th에서 맥주 한 병을 걸치며 야경을 감상하는 것으로 오늘 하루를 마감하기로 했다. 뉴욕을 처음에 왔을 때 갔던 Empire State Building과 Top of the Rock이 훤히 보이는, 그것도 공짜로 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니. 맥주 값이 전혀 아깝지 않다라고 생각하며 꽤 괜찮았던 하루를 곱씹어보았다.
세번째 방문이어서 그런지 전혀 낯설지 않고 친근했던 뉴욕은, 혼자 온 나에게 마치 현지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했다. (물론 여기에서 살게 되면 받는 스트레스는 어마어마하겠지만) 여전히 바쁘고, 생동감있는 이 도시는 언제와도 할 게 많고, 갈 곳도 많으며, 어디를 가도 영화 한 장면인 것 같은 어느 도시와도 비교할 수 없는 매력이 넘친다. 혼자 여행한 탓에 내가 좋아하는 것만 먹고, 내가 가고 싶은 곳만 갔기 때문인지, 개인적으로 굉장히 만족한 여행이었다. 언제쯤 다시 방문하게 될까, 또 어떤 새로운 곳을 발견하게 될까, 곧 다시 올 수 있게 되기를 갈망하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