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밴쿠버에서 조용히 보내는 땡스기빙 주말
캐나다의 추석 개념인 땡스기빙(Thanksgiving) 주말이 다가왔다. 원래 같았으면 분주하게 모임 약속을 잡느라 구글 달력이 꽉 차 있었을 텐데, 이번 해는 여러모로 신기하게 흘러가고 있다. 항상 땡스기빙 때가 되면 캐나다 사람들은 습관처럼 '자신이 감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WhatIAmThankfulFor이란 해쉬 태그를 써가며 공유하기 바쁘기 마련이었지만 이번 해는 소셜미디어의 인기가 시든 탓인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사람들이 모임을 안 가지기 때문인지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 자체도 조용한 느낌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4월 이후로 뒤늦게 시작한) 마스크 쓰기 권장을 통해 한창 코로나 바이러스의 추세가 가라앉나 싶더니 캐나다에도 제2차 확산이 시작되려는 듯, 잠잠하던 그래프가 다시 요동을 치고 있다. 하루에 2천5백 명이 넘는 확진자가 발생해 지금까지 18만 명 이상의 확진자가 나왔고, 머지않아 사망자가 만 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추세를 모르는 바 아닌 캐나다 정부는 이번 땡스기빙 주말 모임을 가능하면 자제할 것을 권고하고 있으며, 실제 많은 캐나다 사람들은 평소와 달리 더 적은 규모로 가족 모임을 하거나 모임 자체를 꺼리고 있다.
평소 즐기던 '일상' 자체를 빼앗겨버린 것에 대해 불평불만을 토로할 만도 한데, 캐나다 사람들은 이제 코로나 바이러스 자체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나가야 될지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내가 이 나라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만나본 것이 아니니 개인차가 있을 수 있으나, 문화적으로 봤을 때 캐나다 사람들은 일희일비하거나 감정에 동요되지 않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으며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두 개로 나눠진 당파로 사람들을 가르고,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미국의 정치적인 상황에 대비해 봤을 때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차분하달까. 물론 캐나다에서도 비이성적이고 몰지각한 마스크 반대 시위나 인종차별이 아예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며, 최근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 아시안 사람들에 대한 인종차별이 급격히 늘어나기도 했다. (실제로 Covid-19이 터지고 난 후 밴쿠버에서 일어난 인종차별에 의한 폭력사건은 인종차별이 드문 이 사회에 크디큰 충격을 주었다. 비디오 참조: https://youtu.be/dIpNYiQc00w *주의: 폭력적인 장면이 포함됨)
캐나다에 이민을 온 지 햇수로 딱 10년 째인 나에게도 차가운 이성이라는 게 조금이라도 장착되었으면 좋으련만. 종종 캐나다 사람으로 착각을 당하는(?) 나는 여전히 열정과 파이팅이 넘치고, 활활 끓어오르는 가마솥 같은 토종 한국인이자 감정적인 인간이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나의 감정은 마치 캐나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지표를 보는 것만 같다. 나는 사실 3월 코로나가 터지고 지역적인 봉쇄에 들어갔을 때, 과연 지극히도 외향적인 (MBTI에서 내향성을 뜻하는 "I: Introverted"가 나온 적이 없는) 내가 과연 잘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컸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내 안에 내재되어 있던 '집순이 게이지(Zipsooni Gage)'가 120% 끌어올려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며 지낸 7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나의 삶의 질은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감사를 주고받는 땡스기빙 주말을 맞아 그 이유를 뽑아보자면:
1. 근검절약 및 저축의 생활화
캐나다는 한국처럼 패션이 발달한 나라는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패션 용품을 향한 지름신이 강림하는 횟수는 적지만, 그래도 쇼핑 거리인 랍슨 거리(Robson Street)나 다운타운에 있는 지하상가인 퍼시픽 센터(Pacific Centre), 혹은 관광 명소인 개스타운(Gastown)에 마실을 나가면 꼭 뭔가를 사들고 집에 오곤 했는데, 대부분 집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니 쓸데없는 데 돈을 쓰지 않게 됐다. 실제로 이번 한 해 구입한 것은 7월 생일을 맞아 산 분홍색 원피스 하나뿐. 이처럼 내가 산 게 무엇이고 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정도로 쇼핑을 자제하며 소비 지출이 줄어든 대신 저축이 늘어났다.
2. 외식을 줄이고 집에서 요리하는 시간이 늘어남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 다운타운의 한 대형 백화점에서 패션 관련 일을 했을 때는, 하루에 세 끼를 모두 밖에서 해결할 정도로 외식이 잦았었다. 그래서 나의 개인적 신용카드 정산서가 한 달에 5천 불(약 5백만 원을 밑도는) 씩 나오고는 했으며 카드 내역의 대부분은 아침에 카페에서 먹은 커피 및 빵 종류, 점심과 저녁 식사 등을 포함한 외식비였다. 하지만 번아웃 증후군과 제2차 질풍노도의 시기가 와서 퇴사를 하고 코로나가 터지고 난 후, 평소 싫어한다고 생각했던 요리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날마다 다른 요리를 해 먹고, 재료를 직접 손질하고 양념까지 제조하니 밖에서 먹는 것보다 더 맛있을 때도 있어 가끔 깜짝깜짝 놀라는 나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는 요즘이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나서 북미 및 유럽 지역에서 빵 만들기(정확히는 Sourdough: 발효시켜 시큼한 맛이 나는 빵)가 유행을 한 후, 한동안 휴지 대란에 이어서 밀가루, 효모 대란이 일어났었다. 작년에 친구와 바나나 빵을 집에서 만들어 본 게 다인 나는 이번 코로나를 통해 빵 만들기에 도전했고, 굉장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특히 한국분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따라 해 본 추억의 우유식빵은 어릴 적 우유에 빵을 적셔 먹던 추억을 소환시켜주었다.
3. 매일 하는 집에서의 요가 30분과 꾸준한 산책을 통해 살이 빠짐
세계 보건기구(WHO: World Health Organization)가 코로나를 대유행병(Pandemic)으로 늦장 선언(!) 한 이후, 원래 가던 헬스장의 멤버십이 자동으로 3개월 동안 정지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정부의 지침에 따라 필수 사업체인 식품 마트 및 약국, 병원만 영업을 지속하고, 식당에서는 테이크 아웃만 허용된 관계로 다른 사업체는 거의 3개월 동안 문을 닫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코로나 확산세가 줄어든 6월 이후, 헬스장은 재개장되긴 했으나 1시간당 50명씩만 받는 예약제로 전환되었다. 스트레스받으며 피 터지게 예약을 하려고 끙끙대는 대신, 잦은 산책과 더불어 매일 30분씩 유튜브를 통해 집에서 공짜로 요가를 하고 있는데, 일주일에 2~3번씩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할 때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특히 팔다리, 허리의 근육량이 늘어난 덕분에 자고 일어나면 욱씬대던 허리 통증이 많이 개선되었다. (하지만 뱃살은 여전한 게 함정)
4. 워라밸이 완벽하게 맞춰짐
운이 좋게도 코로나 사태가 터지자마자 프리랜서로 일을 구하게 됐다. 내가 평소 가장 애정 하는 밴쿠버의 레스토랑 중 한 곳에서 패키징 디자인을 해달라는 문의가 들어왔고,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신속 정확"한 업무 처리 덕분에 단발성이었던 계약이 몇 달간 더 연장이 됐다. 덕분에 처음에 문의가 들어온 소스 패키징 디자인부터 시작해서 집에서 만들어 먹는 세트인 밀 키트(Meal Kit) 레시피 카드 디자인, 메뉴 디자인 및 웹사이트 디자인은 물론이고 사진 및 비디오 촬영까지 폭넓게 도맡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최대 일주일에 20시간씩 일하고, 내가 일하는 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여 효율적으로 일처리를 해 낸 결과, 개인적 삶과 일하는 삶의 균형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사상 초유의 일이 일어났다. 이쯤 되니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 패션계를 그만둔 게 신의 한 수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5. 꾸준한 글 쓰기
2017년에 우연히 발견한 브런치에 가입하고 한동안 열심히 글을 쓰다가, 게으름과 바쁘다는 핑계로 글을 놓아버렸었다. 하지만 코로나를 통해서 나의 우선순위를 제대로 확립하는 계기가 됐고, 나의 인생 목표 중의 하나인 <책 출간>을 위해서 다시 마음을 잡고, 열심히 글을 쓰는 중이다. 브런치 북에 당선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이야기가 다른 누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과정 자체를 즐기고 있다.
6. 자아 성장
이민 10년 차, 패션계에서 자리 잡으려 무던히 노력해 왔던 나의 모습을 돌아보며, 실수를 용납하지 않고 나 자신에게 가혹했던 나를 용서하고,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나가고 있는 요즘. 지난 어떤 해 보다 이번 해에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성장하지 않았나 싶다. 특히 자기 전 매일 꼬박꼬박 일기를 쓰며 하루를 정리하는 것과 명상을 들으며 잠에 드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되어주고 있다. 예전에는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 및 자책감이 있었는데, 요즘은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를 보며 하루를 보내도 "이번 주 열심히 일했으니 나에게 주는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등, 생각하는 관점과 태도가 많이 긍정적으로 변화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 모든 것이 코로나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내게 오지 않았을 일들이기에, 코로나 덕분에 삶의 질이 향상되었음을 몸과 마음으로 절실히 느끼는 중이다. 코로나 사태를 통해 남과 비교하며 내가 가지지 않은 것에 불평하는 삶을 살기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만족하며, 소소한 삶의 행복을 찾아가는 재미를 얻을 수 있었고, 앞서 말한 많은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가 발생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땡스기빙 주말, 이 자리를 빌려 다른 누구도 아닌 중국과 코로나 바이러스를 향해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