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손가락 같은 자식이 잘 자랐더라.
내게 여수는 그런 곳이다.
국토 최남단의 도시, 섬 인듯 섬이 아닌 곳.
섬이 많아서 좋고 섬이 많아서 짠하다.
붓으로 찍어 놓은 섬들은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재잘거리다가
새벽 동녘에 잠시 눈을 붙이고 뱃고동 소리와 함께 다시 분주하다.
동해 바닷가 해안은 너나 할것없이 일제히 한줄이라
거칠 것이 없고 시원한 바람과 억센 파도가 성격이라면
여수 앞바다는 나비의 품안같아서 고난한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도 늘 고요하다.
차라리 파도가 방파제를 실컷 때려서 하루종일 울부짖었더라면
한스러운 이곳의 역사가 덜 안쓰러울지도.
500년전 전란의 핏물이 강물을 이루었던 흔적은 이제는 없다.
이섬을 굽이쳐 나오고 저섬 어귀에 엉겨붙은 기록조차 되지 못한 사실들은
기억속에서 입으로만 입으로만 전해지다가
죽은이의 입꼬리를 따라 물결 아래로 가라앉았다.
바닷속으로 쓸려가지 못한 억센 역사는 갓나물 뿌리로 스며들었고
역사는 마침 식당 기본반찬이 되었다.
거뭇하고 억센 갓김치의 줄기에는
여수 사람들의 억척스럽고 질긴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다.
광양을 지나 여수를 들어올때면 이순신 대교를 지나게 되는데
왜선을 막기 위한 쇠줄은 물속으로 가라앉았고 이제는 물류 선박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수면에서 한참이나 높은 다리판을 찌를 듯 버티고 있는 교각을 보노라면
'어떤 고난에도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우리 민족의 의지가 녹아 있는 듯해서
장엄하면서도 가슴이 뭉클하다.
1월에서 4월까지 대양과 맞닿은 해안선을 따라가다보면
한겨울임에도 동백꽃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오동도, 향일암..
아직 잎이 없는 이름모를 나무들과 동백꽃
남해 파도와 바위들이 뿜어내는 연무와 난대식물 군락의 착찹한 공기는
자극적이지 않은 햇살과 함께 이국적 상쾌함을 선사한다.
이제 여수에는 노략질을 하러 오는 왜선과 왜구는 없다.
다만 관광단지 개발업체와 부동산 투자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어쩌면 주민들은 여전히 침탈의 역사속에 있다.
화려한 팬션 아래, 높은 호텔의 그림자 뒤에는
이곳을 지켜왔던, 앞으로 살아가야 할 토박이들이 게장 껍데기처럼 붙어 산다.
그래서 여수는 눈물겹게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