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약인 것을

삶은 때론 원하지 않은 숙제를 준다

by 솔빛태연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중년의 여성이 자신감 없는 초췌한 얼굴로 의자에 몸을 맡긴다. 예약 시간보다 10분 먼저 도착한 그녀는 세상의 모든 고민을 혼자 짊어진 듯했다.


더 이상 살 희망이 없다는 표정과 자세에 말을 붙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진다. 따뜻한 차 한잔에서 허브 향이 서서히 올라오지만, 그녀는 찻잔만 만지작거리며 깊은 한숨부터 내쉰다.



상담하다 보면 내담자의 외관에 특별히 신경을 쓰지는 않는 편이다. 아주 이례적인 모습이 아니라면 보편적인 기준과 상식에서 출발하려 한다.


선입견은 배제하고 말투와 사고방식, 대화할 때의 자세를 보며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고자 노력한다.


마주 앉은 그녀는 지쳐 보이지만, 조용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화가 시작되고 나이를 보니 60대가 갓 넘은 그녀에게 고민의 문제가 커 보였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그녀가 먼저 말을 건네길 기다렸다. 그녀는 따뜻한 차 한 모금을 삼키는 것조차 버거운 듯 무척 지쳐 보였다. 입술만 간신히 축인 입안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윽고 그녀가 조심스럽게 첫마디를 뗐다.





“선생님, 저 여기까지 나오는데 정말 살려고 나왔어요.”


“그러셨군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참 잘 나오셨어요.”


“사실 살고 싶지 않아요. 세상이 다 무너진 느낌이거든요. 남편 사업이 부도 나서 살던 집도 내놓고 이사까지 하고 나니 앞으로 더 살아갈 길이 막막하네요.”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누워 있으니 너무 답답해서 무작정 밖으로 나왔어요. 바람도 쐴 겸 머릿속 생각도 정리해야 할 것 같아서요.”



“부도를 맞은 남편분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혹시 남편분의 마음을 살펴본 적이 있으실까요?”


“그 사람은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당장 경제적인 타격이 크니까요.”


“네, 그러시군요. 혹시 지금까지 살면서 경제 활동을 해 보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신가요?”


“네. 집에는 늘 도우미분들이 계셨으니까요. 이런 상황이 닥치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더 희망이 없게 느껴져요.


얼마 전 짐을 정리해 아주 작은 평수로 이사했는데, 그곳에 적응하는 것도 어렵고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어요.”


그녀의 말속에는 무언가 일을 하고 싶으면서도 경험이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두려움, 그리고 경제적 해결책이 없다는 답답함이 묻어났다.




아무것도 해 본 적이 없다는 무력감이 그녀를 더 좌절케 하는 듯했다.


하지만 울며 무력하게 있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부부는 이렇게 힘들 때 그 짐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에게 제안했다.


“지금까지 가정을 위해 애쓴 남편분에게 비록 힘들지만, 조금이나마 돕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해 보면 어떨까요? 남편의 지친 어깨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 보는 거예요.”


말없이 눈물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에 내 마음속에도 뭉클한 감동이 일었다.


어떤 일이 현실적인 도움이 될지, 경험이 없어도 낯설지 않게 금방 해낼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산후 도우미' 과정을 권해 보았다.


자녀를 키운 경험에 이론과 실습 교육을 더 한다면 이른 시일 내에 일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는 사람을 마주치면 자신이 초라해질 것 같다며 거주지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일하기를 원했다.


그녀는 산후 도우미 일이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며, 무력하게 있기보다 교육을 철저히 받아 빨리 시작해 보겠다고 결심했다. 1시간 전, 무거운 마음으로 상담실에 들어섰을 때와는 달리 그녀의 눈빛은 자신감 있게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전문적인 경력이 없는 60대의 여성이 갑작스레 무리한 투자를 해서 일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

기술을 너무 장기적으로 배우는 것 또한 현실감이 떨어질 수 있다. 자신의 나이를 고려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



내담자가 밝아진 표정으로 "상담하길 정말 잘했다"라고 말할 때 상담자로서 커다란 뿌듯함을 느낀다.


답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 속에서 대안을 찾고자 애쓰는 시간은 결국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힘이 된다.



나 같은 경우에도 40대에 시작한 상담일이 어느덧 60대에 이르고 보니 현실적인 고민을 하는 중년의 여성을 많이 만난다.


본인의 역량에 따라 제2의 인생 후반부를 설계하는 사람들도 있고 뜻하지 않게 일을 하는 경우도 만난다.



나이가 듦으로써 내담자의 걱정도 함께 공감하며 현실적인 고민을 하는 장점도 있고 나 스스로 지혜롭고 현명한 멘토가 되기 위해 계속 노력하는 중이다.


젊은 사람들의 생각도 고민하고 핫한 성수동 순례나 한남동 순례 프로그램도 참여하면서 세상과 호흡을 맞춰가는 중이다.



다시 좋은 소식을 전하겠다며 손을 흔들고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 역시 그녀의 앞길에 축복의 마음을 전해본다.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행복한 일들만 가득하길 진심으로 빌어주었다.



[덧붙이는 글] : 몇 달 후 밝은 미소의 그녀가 방문했다. 얼마 전 취업을 하고 사랑스럽고 예쁜 아기들을 돌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고 감사하다면서 꼭 근황을 알려주고 싶었다며 소식을 전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