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변하니 향기, 그 뜨거웠던 날의 기억마저도 바뀐다
‘나와 첫가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새벽에 깨자마자, 이제 ‘와 가을이다!’
낮은 외침이 입에서 터져 나온다.
“가을을 찾아내는 풍요로움이 주는 기쁨은 그 기척을 먼저 알아차리는 자의 몫이다”
계절이 변하니 향기, 그 뜨거웠던 날의 기억마저도 바뀐다.
한 낮과는 다르게 새벽녘엔 제법 서늘한 바람이 거실 미닫이 창을 걷어차면 들어온다.
아! 혼자 말로, “이번 여름은 정말 대단했어”라고 중얼거린다.
“미친 듯 이상해져 가는 더위에 더 뜨거워진 이 여름의 열기를 어떻게 식힐까?”를 고민한 게 어제 같은데,
어느새 새벽 공기에 발가락 근처에서부터 종아리마저도 찬기운에 시려온다..
노란 은행나무 열매가 냄새가 풍기는 초가을 저녁때 그늘 아래 가만히 엎드리면 쓸쓸한 기분이 서성이다가 사라진다.
역시,
“가을은 먼 데서 와서 여름이 남긴 가장자리 끝 자리에 머무는가 보다”.
그래서 어느 계절보다 쓸쓸한가 보다”.
더위로 미루었고 게을러하지 못한 새벽 운동 겸 가벼운 옷차림으로 산책 길을 나선다.
막 어둠이 걷힌 이른 산책길엔 온몸으로 체감되는 가을 기운이 역력하다.
불과 며칠 전 속옷이 땀에 젖은 채 깨어나 망연히 앉아 있던 새벽과는 이마에 닿는 공기가 완연하게 달라진
거다.
바람이 잔잔한 새벽길엔 어두운 풀숲에서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가늘고 쓸쓸하다.
그토록 찬란하고 긴 여름이 이렇게 끝나버려 어리둥절할 지경이다.
집 나온 바로 앞, 공원을 건너서 조금 먼 거리로 한강변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온다.
공원 한쪽 곁엔 무언가 길바닥을 널브러진 숨결이 끊겨 꿈쩍도 않는 매미들의 잔해를 본다.
놀라 다가가서 보니, 그건 죽은 매미들이었다.
검고 하얀 게 말라버린 매미들이 계절의 변화를 먼저 알아차린 듯하다.
차가워진 새벽 기온 탓만이 아닌 죽음이란 순리이리라!
역시 가을이 주는 기쁨은 그 기척을 먼저 알아차리는 자의 몫이다.
돌아와 앉은 작은 내 방에 가을이 닥치기 전 내겐 할 일이 있다.
먼저 책장의 책 정리와 가구 위치를 바꾸고, 여벌의 챙겨두었던 옷가지와 읽지 않은 채 쌓인 책들은 골라서
버려야겠다.
옷장에는 강의할 때에 입었던 정장 류의 슈트와 드레스 셔츠, 타이가 거의 대부분이다.
사놓고 근래 한 번도 입지 않은 것들도 태반이다.
그동안 너무나 많은 것을 끌어안은 채 살았다.
따지고 보면 쓰임이 불 분명한 물건을 못 버린 건 쓸데없는 욕심 탓이다.
“혹 나중에 쓸 데가 있겠지!” 라며 쟁여 둔 물건은 끝내 쓸 데를 찾지 못하고 짐만 된다.
적게 소유하고 간소한 방식으로 살아가려고 마음먹는다.
신발 한 두 켤레, 몸을 가릴 옷 서너 벌, 책 몇 권이면 충분할 테이다.
과연 불필요한 것들과 헛된 욕심을 버리고 나면 사는 게 가벼워질 끼?
이 가을엔 마음의 안식처인 짠 소금 냄새가 나는 동해바다도 찾아가 볼까 한다.
그곳엔 해풍의 짠내음이 바람과 함께 온 이 내 마음은 해 질 녘 바다 위 황혼처럼 다시 타오를 수 있을까!
아! 그렇지.
그 지난 시절은 이미 지난날이라 돌아갈 수 없게 되었지만,
소소한 얘기에도 손바닥을 입을 가리며 살포시 웃음을 지어주던 그대의 안부도 모르고 사는 건 옳지 않은 일이다.
무슨 일로 그리 바빴던 걸까?
혹시 내가 잘못 산 것은 아닐까?
그리곤 올가을엔 일부러 기른 콧수염을 면도하고 새 옷을 입고 어머니가 계신 바닷가 요양원도 다녀와 볼까!
하릴없어도 바쁜 하루이지만 그럴 시간은 있겠지.
이제라도 덧없는 욕심을 비우고 나면 시골 고향집으로 가야겠지.
이상하다! 왜?
이 가을로 가는 환절기엔 매번 마음에 쓸쓸함이 이토록 거칠게 붐비는 걸까?
새벽 한강을 흐르는 물은 희고 푸르고 그위로 회색 구름은 느리게 흘러간다.
이름 모를 새떼가 줄지어 나는 동녘 하늘을 보며 누군가가 미치도록 그리워질까?
가을이 주는 기쁨은 그 기척을 먼저 알아차리는 자의 몫이다.
가을은 먼 데서 와서 여름이 남긴 쓸쓸한 가장자리에 머무는가 보다.
볕 들지 않은 마음 구석의 흰 그늘이 빛날 때 그 황혼은 내 모습과 닮았고,
사방에 어둠 내린 뒤 밤하늘에는 낯선 별 몇 점이 떠 올라와 있겠지.
이제 곧 새벽엔 기온이 떨어지고 곧 서리가 내리겠지.
어쩜 이 가을은 내 처지랑 같이 닮아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