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알아버리면 2)
4월 21일.
벌써 내 짝꿍 H와 결혼한 지 23년이 됐다.
H를 처음 알게 된 시간부터 헤아려보면 35년째 알아버린 사람이다.
중학교 시절 행복한 가정을 꼭 이루고 말 거라는 나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물론 간절히 품었던 꿈처럼 내 짝꿍은 술도 마시지 않는다. 엄마에게 높은 점수를 받은 이유였을 것이다.
간경화로 돌아가신 아빠로 고생이 많았던 엄마는 안정된 직장도 없이 병역특례업체를 다니고 있던 H를 받아줬다.
그때 결혼적령기는 25~26세 정도였다. 우리는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고 엄마는 연애 기간이 길어지는 것도 불안했는지 시어머님께 전화해서 둘이 하루라도 빨리 결혼식을 치르자고 했다.
기대는 마시라. 혼전임신은 아니었으니.
우리 마음은 결혼하기에 충분했지만 결혼은 마음으로만 하는 게 아님을 결혼 준비를 하면서 알게 됐다. 그럼에도 난 룰루랄라 H의 손을 잡고 가전제품과 가구들을 보러 다녔다.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25만 원. 우리 첫 보금자리의 경제적인 가치다.
콩깍지가 벗겨진 다음에 생각해 보니 내가 어리긴 했다.
‘삼성반도체 다니면서 적금 들어놓은 3000만 원이 있었는데 왜 나는 보증금에 보탤 생각을 못했을까?’
‘왜 엄마 손을 붙잡고 신혼집에 들어갈 물건들을 사지 않고 H와 다녔을까?’
50세도 안 돼서 혼자되신 엄마에게 적금의 일부를 드리고 결혼하긴 했지만 내가 철이 없었던 건 확실하다.
그때는 오로지 H만 보였으니까.
사업을 하는 내 짝꿍은 퇴근 후 나와 밥을 먹다가 투덜거리며 얘기했다.
“사람이 한결같아야지!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사람 진짜 짜증 나! 지랄 같으려면 계속 지랄 같던가! 사람 봐가면서, 상황 봐가면서 바뀌는 사람 딱 질색이야!”
내가 알아버린 그 사람은 나에 대하여 ‘한결같은 사람’이다. (눈꼴사나워도 읽어 주셔야 한다.)
네 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도 뽀뽀하는 우리들을 보면 딸이 소리 지른다.
“아빠! 제발 공공장소에서 그러지 마세요!”
“공공장소라니! 여긴 내 집이야!”
10대부터 50대가 되도록 나를 보고 있는데 얼마나 비교가 잘 될까 싶다. 내 얼굴의 팔자주름이며 이곳저곳 내려앉은 세월의 흔적을 H라고 모르겠는가! 출산 후 변화된 내 몸을 보면서 한숨 쉴 때가 가끔 있다.
“이쁘기만 하고만! 그게 다 상급이야! 그렇지 않으면 우리 얘들이 어떻게 나왔겠어?”
“그건 그래! 헤헤헤”
바깥사람들한테는 친절하면서 유독 가족들 함부로 여기는 사람들 보면 화가 난다고 H는 자주 내게 말했다. 난 가족들 위해서라면 발가벗고 춤도 출수 있다고!
모든 부부가 그렇듯이 희로애락으로 동지가 되기까지 굴곡진 스토리가 얼마나 많이 있겠는가! 나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6년간 지속된 아들의 중이염을 겪으면서 찾아온 만성두통을 받아들여야 했다. 약국에서 판매하는 진통제로는 진정되지 않아 서울 두통 전문 병원에도 다니고 MRI도 찍었다. 두통이 심하게 오는 날이면 눈 번쩍거림, 메슥거림, 구토까지 동반됐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H는 퇴근 후 고단한 몸으로 저녁 준비, 설거지, 세탁기까지 집안일을 기꺼이 맡아서 해줬다.
내 짝꿍 H는 “성실함”이 한결같은 사람이다.
직업을 통한 성실함의 결과가 풍성하다면 성취감도 생겨서 대부분 넉넉히 감당했을 것이다.
H는 별을 보고 나갔다가 별을 보고 들어 왔지만 우리의 경제 상황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한 여름밤 나는 새벽에 나가 새벽에 현관문을 열고 퇴근하는 H를 맞이했다. 검정 반팔 라운드 면티에 땀으로 소금이 되어 하얀 얼룩이 져있고, 눈은 흐르는 땀을 닦느라 빨개져 있었다.
그 세월을 10년 가까이 한결같이, 성실하게 가정을 위해 애썼다. 우리는 아이들을 재워놓고 서로가 안쓰럽고 마이너스 인생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으로 그분 앞에서 부둥켜안고 우는 날이 많았다. 그 당시 8평 안방가구에는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는 말씀이 누렇게 바래져 오랫동안 붙어 있었다.
사업시작으로 인해 우리는 안산에서 당진으로 이사를 왔다.
“와! 우리 집 거실에서 주방까지 뛰어가도 되겠는데!”
“얘들 방에서 집 전화 소리 안 들리는 거 아니야? 큰일이네! 하하하하!!”
H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군산 신혼집 월세에서 시작해서 지금 살고 있는 보금자리로 정착하기까지 다섯 번 이사를 했다. 8평이 34평이 되었다. 빈손으로 시작했는데 결혼 23년을 뒤돌아보니 너무나 많은 것을 가졌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H의 한결같음이 일등공신이다!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이 없었다면, 적어도 나는 가정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주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빈궁한 삶을 통해 우리를 다듬어 갔다. 견고한 부부로 이루어 가심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분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힘겨웠고 고통스러울 때가 많았다.
직장에서 결혼적령기에 접어든 청년에게 들으니 요즘 프러포즈는 명품백이 불문율이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멋진 프러포즈도, 명품백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집도 없었다.
“평온한 바다는 결코 유능한 뱃사람을 만들 수 없다.”(영국속담)는 말이 있다.
우리는 23년의 세월을 같이 보내면서 누구도 끊어 낼 수 없는 '동지'가 됐다! 그 가치는 무엇으로도 살 수 없음을 안다.
H의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빚어진 우리 부부도 가족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유능한 뱃사람이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