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느림이
단순한 느림이 아니라는 걸
처음 직감한 건 여섯 살 무렵이었다.
밝은 성격 덕분에
또래와 어울리는 데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가족도, 유치원도 말했다.
“이 정도 느린 아이들은 많아요.”
“발음만 조금 고치면 괜찮아요.”
나는 유별난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말을 믿는 척했다.
기다리면 된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그때, 그냥 지켜보기만 했더라면 어땠을까.
진단을 받고 우리는 정말 열심히 달렸다.
아이는 조금씩 발전했다.
불분명했던 발음은 또렷해졌고
한글도 결국 뗐다.
또래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읽고 쓸 때
나는 자음과 모음을 수없이 반복했다.
또래 아이들이 쉽게 10 가르기 모으기를 익힐 때
나는 구슬을 굴려가며 수백 번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아이는 따라왔다.
그래,
이렇게 천천히 자라는 거지.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같아지겠지.
나는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자라면서 알게 되었다.
이건 학습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사회성의 문제였다.
또래 아이들은
상황을 보며 저절로 눈치를 배워갔다.
하랑이는
그것마저 하나하나 설명해 주어야 했다.
무엇이 웃기는지,
언제 멈춰야 하는지,
어디까지가 괜찮은지.
자연스럽지 않은 성장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조금씩 드러났다.
초3이 다가왔다.
다시 재검을 했다.
경계선 지능 확정.
이제
희망이라는 말로 덮어둘 수는 없겠다.
아이의 다름을 느끼는 사람이
이제 나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교실에서도,
운동장에서도,
아이들 사이에서도.
그리고 아이 스스로도.
나는 결국 담임 선생님께
아이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 아이를 이해해 달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아이들 속에서
이 아이를 더 살피는 일이
쉽지 않았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이의 무게는 내 몫이었다.
아이가 또래들 사이에서 고립될수록
나 또한 엄마들 사이에서 고립되었다.
치료실 이야기를
학원 정보처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만남의 자리들을 피했다.
비교하지 않으면 덜 아플 것 같았다.
하지만 동생 아랑이를 키우며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평범한 아이는 저절로 자라는구나.
하나하나 가르쳐야 넘어가던 단계를
아랑이는 자연스럽게 지나갔다.
나는 그제야
‘보통’이라는 속도를 보았다.
하랑이가 자랄수록
하랑이 친구 엄마들과는 멀어졌고,
아랑이가 자랄수록
아랑이 친구 엄마들은 내게 다가왔다.
“어떻게 키우셨어요?”
“교육법이 뭐예요?”
낯선 질문이었다.
아랑이는 그냥 자랐을 뿐인데
나는 관심을 받았다.
하랑이는
죽을 만큼 노력하며 키웠는데
나는 매번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를 반복해야만 했다.
사람들의 눈빛은
과정보다 결과를 보고 있었다.
“그냥 방임육아가 최고인가 봐.”
나를 웃게 하려던 오랜 친구의 위로에
나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더 이상 비교를 피해 숨을 수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아이의 속도를
그대로 바라보았다.
그것이
이 아이의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