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초라한 모성애에 대하여
하랑이는 열이 나면 열경련을 동반하는 아이였다.
열이 잡히지 않아 하루에 세 번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간 날도 있었다.
그날도 그렇게 지나갈 거라 생각했다.
6살의 겨울,
하랑이가 쓰러졌다.
금방 끝날 것 같던 경련은 멈추지 않았고
곧 일어날 거라 믿었던 아이는
깊은 잠에서 깨어날 줄 몰랐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뇌염’이라고 했다.
처음 며칠은 믿어지지 않았고,
그다음 며칠은 계속 울기만 했고,
그 후에는 반드시 깨어날 거라 기대했다.
3주가 지나도 아무 변화가 없자
의사는 다시 최악을 이야기했다.
“곧 중환자실로 옮겨야겠습니다.
이대로라면 평생 누워 지낼 수도 있습니다.”
몇 년을 관찰하고 치료하며
이제야 한숨 돌리나 했는데,
이제는 평생 누워 있어야 한다고 했다.
대부분의 부모는
죽음 앞에 선 아이를 두고
살려 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이제는 이 아이를 데려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아이는 더 이상 고통받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숨만 겨우 붙어 있는 채
평생 누워만 있어야 하는 삶을
‘살아 있음’이라 부르며
연장해 달라고 차마 매달릴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아이 없이는 나도 살 수 없으니,
나도 함께 데려가 달라고
차라리 우리를 같이 거두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날 나는
아이 둘과 남편을 모두 버렸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둘째를 보아도
아무런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고,
홀로 남겨져 아이를 키울 남편도 걱정되지 않았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아이를 살려 달라고
우리 가정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지만,
오직 나만은
누워있는 아이와 나의 죽음을 기도하고
또 다른 아이와 남편의 미래를 외면하고 있었다.
주일 아침,
그날도 나는 나와 아이의 죽음을 기도하러
병원 옆 작은 교회의 예배당 문을 열었다.
그날 무슨 설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솔로몬과 두 여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이를 둘로 나누자고 했던 가짜 엄마와
아이를 살려 달라 끝까지 매달렸던 진짜 엄마.
그 순간,
나는 가짜 엄마였다.
그간의 고통을
이제는 끝내버리고 싶은 마음으로,
이미 아이의 손을 놓아버린 가짜 엄마였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사랑”이라는 “모성애”.
그것은 완벽한 거짓이었다.
적어도 나의 모성애는
결코 완벽하지 않은,
그토록 초라한 것이었다.
예배가 끝날 때까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네, 저는 가짜 엄마입니다.
이 아이의 진짜 부모인 당신께
이 아이의 인생을 맡겨드립니다.”
비로소 내 소유라 믿었던 아이를 내려놓은 순간이었다.
며칠 뒤, 아이는 거짓말처럼 눈을 떴다.
사람들은 또 한 번의 기적이라고 했지만,
깨어난 것이
곧 온전한 회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아이의 삶 속의
기적은 찰나였고,
현실은 다시
길고 느린 터널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