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수녀님

우리 인생에 한 번쯤 스쳐간 이들을 기억하며...

by 꿈꾸는 덩나미

수녀님과 연락이 끊어졌다.

너무나 오랜 시간이 지나가 버리면서 수녀님의 존재도 내 삶에 서서히 사라졌다.

지금쯤 돌아가신 건 아닌지... 30년 전쯤 수녀님의 연세가 오십 대 중후반이었으니...

내 오래된 앨범 맨 뒷장에 수녀님의 화사한 미소가 서린 사진 한 장이 남아 있다.


그 당시 나는 삶에 대해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20대 초반 청년이었다.

그다지 삶에 재미도 없었고 의미도 없다고 느낀 나는 죽음을 꿈꾸며 방황하는 나날을 보냈다.

누군가 나를 알아 봐 주길 바랐고 나라는 존재를 찾아 내주길 바랐지만 온통 잿빛인 세상에 나를 알아봐 주고 손 내밀어주는 이는 없었다.


그때 만난이가 안나수녀님이었다.

기독교인이었던 내가, 천주교에 관심도 없었던 내가, 길가에서 우연히 만난 수녀님을 보고

'저분이라면 무엇인가 인생의 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회색빛의 단아하고 소박한 옷차림이 좋아 보였고 머리에 쓴 보자기 같은 것은 세상 사람과 구별되는 그들만의 표식으로 여겨져 경외감마저 생겼다.

그녀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무엇을 위해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키며 청빈한 삶을 사는 걸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분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삶이 내게도 영향을 끼치길 바라면서 말이다.


"수녀님! 저는 기독교인이지만 수녀님을 따라가 보고 싶어요. 수녀님들의 삶을 알고 싶고 천주교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싶어요." 나의 당돌함에 수녀님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수녀님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초대를 받았다.

수녀님 다섯 분이 일반 가정집 같은 곳에 기거를 하며 기도와 봉사를 하며 평범한 삶을 산다고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집안을 청소하고 힘을 합해 식사 준비를 하고 미사를 드리고 봉사활동을 나가고 오후에 돌아와 또 미사를 드리고 식사 준비를 하고 같이 기도를 하고... 그녀들의 삶은 그다지 재밌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틀속에서 다들 활기차고 자신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되는 일상이 그리 재밌을게 뭐람. 우리네 삶이나 수녀님의 삶이나.


그런데 그 일상적인 삶에 그녀들은 지쳐 보이지 않았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인데도 처음 만나는 날처럼 그렇게 하루를 살아갔다.

그녀들은 오늘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듯했다.

나 같으면 어제와 똑같은 오늘에 벌써 지쳤을 텐데.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궁금하거나 성경적이지 못하다고 느낀 부분들을 질문했고 안나 수녀님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을 해 주시곤 했다.

잘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들도 많았지만 그것은 그들과 나의 교리가 조금 다를 뿐 서로 배타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곳에는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자매도 한 명 같이 살고 있었는데 평소에는 그 누구보다 얌전하다가

한 번씩 발작을 일으키면 모든 수녀님들이 비상이 걸렸다.

그 자매는 희한하게도 옷을 다 벗어 버리고 벌거벗은 몸으로 거실로 뛰쳐나와 춤을 추곤 한다고 했다.

나도 나중에 한번 본 적이 있었는데 너무나 환한 미소를 지으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추는 그 춤이 아름답게 느껴지니 참 이상한 일이었다.

부끄러움은 이미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무슨 마음의 상처가 있길래 그렇게 병든 것일까?

수녀님들은 그녀를 안아주고 기도해 주었다.


어느 날 내가 질문을 했다.

"수녀님! 이렇게 사시는 것 좋으세요? 후회하시지 않으세요?"

수녀님은 예의 빙그레 웃으시며 "난 정말 행복해. 하느님이 내 삶의 전부야. 후회하지 않아.

다시 태어나도 수녀로 살고 싶어."

"수녀가 왜 좋은데요?"

"누군가를 위해 작은 도움이 될 수 있고 얽매임 없이 하느님만 섬기는 삶이 좋아."

수녀님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나는 그들의 기도회에 참여해 보았다.

고요히 말씀을 읽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그녀들의 모습이 참 평화로웠다.

천주교에 대한 나의 선입견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나도 수녀가 되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들이 말하는 프로테스탄트였던 나는 수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곳에서 며칠을 보내고 더 이상 방해를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너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 그것을 잘 알았으면 좋겠어."

수녀님이 나에게 해 준 마지막 말이었다.

그래 난 가치 있는 사람이야. 수녀님의 말씀이 맞아.

그렇게 수녀님과 짧은 만남의 긴 이별을 했다.

가끔씩 전화를 하며 수녀님께 살아있다고 안부를 전하기도 하였다.

방해가 될까 봐 자주 그렇게 할 순 없었지만 잊을만하면 연락을 하곤 했다.

그렇게 조금씩 수녀님과의 인연도 멀어져 갔다.


그 당시 수녀님은 올리브나뭇잎이 붙여진 카드 한 장을 나에게 주었다.

예수님이 사신 이스라엘땅에서 가지고 온 거라면서.

"예수님이 늘 너를 지켜 주실 거야. 힘내서 살아보렴."

그렇게 따뜻한 마음으로 내 인생 어느 순간을 지나가신 수녀님.

오늘 부쩍 생각나는 건 내가 조금 외로워져서일까?


수녀님!

방황하는 그 시기에 제 곁에 지나가 주셔서 감사해요.

지금쯤 호호 할머니가 되셔서 어딘가에서 힘들고 지친 이웃들을 위해 기도하며 사시나요?

아니면 천국에 들어가셔서 그곳에서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계시나요?

수녀님!

오랫동안 수녀님을 잊고 지낸 건 제가 그만큼 삶에 충실했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니 너무 섭섭히 여기지 마시고 천국에서 만나면 저 한번 안아주세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온 거 칭찬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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