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기다리는 도서관

토론토의 늦은 겨울, 다시 시작되는 책의 시간

by 느린 계절
Toronto star.jpg 3월 8일 자 《Toronto Star》

올해 토론토의 겨울은 최근 몇 년 사이에서도 유난히 혹독했다. 추위는 말할 것도 없고, 비교적 따뜻했던 가을이 지나자마자 11월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은 마라톤이라도 하듯 쉬지 않고 내렸고, 어느 순간 토론토라는 도시를 통째로 덮어 버린 듯했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 11월 이후 최근까지 눈이 계속 내려, 채 치워지기도 전에 또다시 눈이 쌓이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 결과 도시는 70일이 넘도록 눈과 함께해야 했고, 건조하게 맑은 날씨는 30일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토론토의 겨울에 또 하나의 새로운 장이 추가된 셈이었다.

이렇게 끝날 것 같지 않던 겨울이 지난 주말부터 조금씩 물러갈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토요일에는 11월 이후 처음으로 기온이 두 자릿수를 기록했고, 오늘은 초봄을 느낄 만큼 따뜻하고 화창한 날씨가 이어졌다. 마치 토론토의 봄이 조심스럽게 도착을 알리는 듯했다.

나는 평소처럼 별생각 없이 겨울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가, 다시 들어가 옷을 갈아입어야 할까 잠시 망설일 만큼 날씨가 따뜻했다. 거리에는 이미 반소매 셔츠나 가벼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활보하고 있었다. 마치 다른 계절의 도시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려 네 달 가까운 시간 동안 눈 외에는 다른 풍경을 상상하기 어려웠던 거리에서 눈이 사라진 모습을 보자, 완전히 새로운 도시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들뜬 걸음으로 영 스트리트를 따라 남쪽, 다운타운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Yonge street 5.jpg


도서관, 토론토인들의 거실


내가 사는 아파트 근처 영 스트리트에서 남쪽으로 산책할 때면 종종 들르는 곳들이 있다. 조금 비싸지만 품질만큼은 토론토 최고라고 믿는 식료품점과 정육점, 시푸드 가게, 그리고 캐나다의 대표적인 잡화점 Canadian Tire 같은 곳들이다. 아주 자주 가는 것은 아니지만 갈 때마다 작은 설렘을 주는 곳들이다.

하지만 오늘은 읽을 책을 빌릴 겸 토론토 시립 도서관, Toronto Public Library로 발걸음을 옮겼다.

Toronto Public Library는 내가 토론토에 살면서 가장 인상적으로 느낀 공간 가운데 하나이다. 책과 잡지, 신문은 물론 영화와 비디오까지 대여할 수 있고, 컴퓨터와 프린터도 사용할 수 있다. 책을 읽거나 공부할 수 있는 공간도 잘 마련되어 있다.

북모바일 서비스나 디지털 접근도 가능해 시민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다.

토론토에는 이런 도서관이 약 100곳 가까이 있고, 17개 구역과 80여 개 지역 공동체를 잇는 네트워크로 운영되고 있다. 토론토에 와서 내가 놀랐던 것은 이 도서관들이 단순한 전시용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용하는 생활공간이라는 사실이었다. 또 하나 인상적인 점은, 휴일을 철저히 지키는 이 도시에서 이 도서관만큼은 주요 공휴일을 제외하고 거의 연중 문을 연다는 사실이다.

내가 사는 지역의 도서관도 갈 때마다 늘 사람들로 붐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그 공간이 참으로 intergenerational 하다는 점이다. 어린아이부터 노년의 시민들까지, 모든 세대가 자연스럽게 함께 이용한다. 그래서인지 이 도서관은 많은 토론토 시민들에게 마치 거실 같은 공간처럼 느껴진다. 이곳이 그들에게 쉼터이자 일상의 일부가 된 공간임을 쉽게 느낄 수 있다.

library 1.jpg 토론토 레퍼런스 라이브러리, 토론토 다운타운

도서관에서 떠오른 오래된 기억


캐나다에서 뒤늦은 나이에 다시 공부를 시작한 나에게 이곳 Toronto Public Library는 학교 과제에 집중하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지금처럼 백수의 시간을 보내는 요즘에도 가끔 이곳을 찾으면 마음을 가다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어느새 이 도서관은 나의 현재 생활을 지탱해 주는 조용한 공간이 되었다.

생각해 보니 도서관은 나의 어린 시절과 10대를 관통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책을 좋아했던 나는 초등학교 시절 거의 매일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특히 10대였던 고등학교 시절, 종로에 있던 정독도서관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당시 마포에 살던 나에게 종로는 그리 가까운 곳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그 도서관을 자주 찾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의 나는 꽤 먼 길을 기꺼이 걸어가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 이유는 당시 내가 속해 있던 문학 서클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그 모임에서는 매주 한국 문학 작품을 정해 읽고 주말마다 함께 토론을 했다. 또 그 시절 유행하던 ‘문학의 밤’ 행사에서는 1년 동안 쓴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고, 언젠가는 문예지를 만들어 보겠다는 작은 꿈도 품고 있었다.

어쩌면 그때 읽어야 했던 책들이 정독도서관이 아니면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당시 가장 ‘힙한’ 거리였던 종로에 더 자주 나가고 싶었던 나의 성정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처럼 바쁜 시간의 흐름에서 잠시 벗어나 도서관에 앉아 있으니, 그 시절 정독도서관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그 시절 이후로 정독도서관을 떠올린 일은 거의 없었다.

백수의 시간이라는 것은 참 묘하다. 어느 날 문득 오래된 기억을 현재로 불러내기도 한다.

정독도서관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을까. 있다면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오늘 도서관에서 모처럼 빌린 책은 캐나다의 대표적인 작가 Margaret Atwood의 소설 The Edible Woman이다. 그녀는 캐나다 문학에서 거의 상징적인 존재로, 한국의 박경리 선생이나 박완서 선생에 비견될 만큼 큰 위상을 지닌 작가이다.

그 시절, 이효석의 '메밀꽃 무렵'이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 같은 작품들을 빌리던 10대 소녀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 소녀는 이순의 나이에 지구 반대편 캐나다에서 Margaret Atwood의 소설 The Edible Woman을 빌리고 있다.


어쩌면 한 사람의 독서 인생은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건너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이 작품은 그녀의 초기 작품 가운데 하나로, 어느 정도 자전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소설의 배경이 내가 살고 있는 토론토 미드타운이며, 세 명의 여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사실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내가 애정하는 Rosedale Ravine, 로즈데일 계곡이 작품의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올봄에는 꼭 읽어 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참이었다.


The Edible Woman.jpg


도서관에서 나오는 길에 grade 10이나 11 정도 되는 토론토 고등학생들이 디자인한 북마커 몇 개를 가져왔다. 토론토 시립 도서관에서는 북마커 디자인 공모전을 열어 수상작을 실제 북마커로 만들어 도서관 이용자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학생들의 아이디어가 이런 공공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활용된다는 점이 참 신선하게 느껴졌다.

집에 와서 세어 보니 북마커가 열다섯 개쯤 된다. 괜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올봄에는 이 북마커의 개수만큼 책을 읽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번득이는 학생들이 만든 북마커들을 하나씩 바라보다가 내 시선은 ‘Every book is a different world’라는 문장에 머물렀다.

책 한 권이 또 하나의 세계라면, 올봄에는 나는 몇 개의 세계를 만나게 될까.


Book marker 8.jpg 토론토 학생들의 북마커 디자인 공모 수상작

오늘의 토론토는 마치 오래전 나의 푸릇한 10대 시절의 도서관 기억을 다시 불러내듯, 눈이 사라진 겨울의 끝과 새로운 계절의 시작을 조용히 알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겨울은 늘 그렇게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기상학적으로는 겨울이 끝나가고 있더라도 3월과 4월은 물론, 어떤 해에는 5월 초에도 눈이 내리곤 한다. 이번 주말에도 벌써 폭설이 예고되고 있다. 날씨에 관한 한 이 도시는 늘 카드 한 벌 속에 조커 한 장을 숨겨 둔 듯한 곳이다.

그래도 괜찮다.

변덕스럼움과 은 불확실성 속에서, 나의 백수의 시간은 아마도 책을 읽고 오래된 기억을 다시 꺼내 보는 시간으로 조금씩 채워지게 될 것 같은 조용한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