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데일 계곡의 물소리

물아래에서 흐르는 시간

by 느린 계절

겨울 속으로 한 발 들어선 며칠 후, 나는 로즈데일 계곡으로 향했다.

한국은 절기로 경칩이 지나 계절은 봄으로 향하고 있지만 이곳은 봄을 체감하려면

최소 한 두 달은 더 기다려야 한다.

캐나다로 이주한 뒤, 이곳에서의 삶에 위안을 느끼게 된 계기가 두 가지 있었다.
그 첫 번째는 오래된 고전영화를 상영해 주는 채널을 발견했을 때였다.

그 채널을 통해 한국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던 그레타 가르보의 영화
<춘희>와 <마타하리>를 보게 되었을 때, 나는 캐나다 생활 속에

작은 위안 하나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오늘 내가 천천히 걸어 들어간 이곳, 로즈데일 계곡이

집에서 채 5분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며칠 전 공원을 걸을 때 이 계곡으로 내려가 볼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눈이 많이 쌓여 있었고,

그 위에 다시 얼어붙은 눈길을 특히 경사진 곳에서 걷는 일은 쉽지 않을 것 같아 미루어 두었다.

하지만 오늘은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이미 마음이 그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눈은 많았고, 얼어붙은 길이 조금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이 계절에 이 시간에 내가 사는

동네에서 가장 사랑하는 로즈데일 계곡으로 간다는 설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내가 사는 곳은 토론토 미드타운이다. 하지만 불과 10분도 채 걷지 않으면 도심의 고층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오는 이곳에 이런 계곡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지금도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이곳을 처음 발견한 것도 우연이었다. 아파트 옆 공원을 산책하다가 어느 날 계곡으로 이어지는

트레일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늘 바깥으로 향하는 내 성정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 길을 망설임 없이 따라 들어갔고,

마치 숲 속으로 안내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 모험을 시작했던 것처럼, 어쩌면 나의 디아스포라 삶 역시

이 계곡을 발견하면서 조금씩 확장된 길 위의 여정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첫 물소리 - 멈추지 않는 흐름


여전히 추웠지만, 조심조심 눈 위를 걷는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이 계곡과 트레일, 그리고 작은 숲 같은 풍경은 날씨가 좋은 날이면

이 지역에서 가장 사랑받는 하이킹 장소가 된다.

평지에서는 조깅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개울가에 앉아 발을 담그며

더위를 식히는 사람들도 있다. 주변 풍경을 스케치하는 사람도 있고, 들풀을 살피는 사람들도 있다.

계곡을 따라 늘어선 오래된 나무들과, 계곡 위쪽으로 언뜻 보이는 집들의 풍경도 이 길을 걷는

또 다른 즐거움이 된다.

이런 모습들은 다른 계곡에서도 볼 수 있는 풍경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곳이 부산한 도심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는 이곳에 살게 되며 얻게 된

작은 행운처럼 느껴진다. 이런 계절에, 이런 시간에, 백수가 아니고서는

좀처럼 가질 수 없는 여유로운 시간이 모처럼 나를 평안하게 했다.

눈길도 생각보다 걷기 어렵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 계절이라 그런지 사람도 많지 않았다.

이 넓은 계곡에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자 한편으로는 자유로웠고, 또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가끔 마주치는 다른 하이커들이 이상하게 반갑게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놀라웠던 것은 물소리였다.

한겨울인데도 계곡의 물은 얼지 않고 흐르고 있었고, 그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Rosedale 4.jpg 로즈데일 계곡, 겨울

날씨가 좋을 때 이곳을 아무리 바쁠 때라도 일주일에 한 번쯤, 혹은 너무 바쁠 때는

한 달에 한두 번이라도 찾아왔었다.

그때도 이 계곡을 사랑했지만, 이상하게도 물 흐르는 소리를 이렇게 또렷하게 들은 적은 없었다.

아마도 그때의 나는 늘 다음 일을 생각하며 걸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물소리는 시간의 흐름을 재촉하는 소리였다.

하지만 오늘 들은 물소리는 달랐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워 주는 소리였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조용히 올라왔다.

물이 바위 사이를 지나며 낮게 숨을 쉬고 있었다.

얼어붙은 겨울 속에서도 계곡의 물은 멈추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기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겨울이 단지 멈춰 있는 계절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이 아무리 깊어도, 완전히 멈춘 것은 없다는 것을 그 소리가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겉으로는 고요하지만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시간이 흐르고 있다.

겨울 계곡의 물소리는 그 사실을 아주 작게, 그러나 오래 들려주고 있었다.


늦게 이해되는 말 - 겨울계곡에서 떠오른 얼굴들


이 계곡은 거창한 자연 풍경에 비하면 아주 작은 곳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을 발견한 이후, 이 계곡은 나에게 늘 특별한 공간이었다.

봄의 연둣빛, 여름의 깊은 녹음, 가을의 단풍 속에서 이곳은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나의 마음을 넉넉하게 위로해 주는 장소였다.

그래서 녹음이 가장 짙은 계절에 이곳을 걸을 때면, 나는 종종 영화 미나리를 떠올리곤 했다.

영화 속 순자(윤여정 분)는 한국에서 싸 온 미나리 씨를 낯선 미국 땅으로 가져와,

아칸소의 개울이 흐르는 숲에 심으며 이렇게 말한다.


“미나리는 원더풀.”


어디서든 스스로 자라나는 그 풀처럼, 이 계곡 역시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나에게
조금은 괜찮다고, 여기에서도 삶은 계속된다고 조용히 말해 주는 곳이었다.

그래서 낯선 미국 아칸소 땅에서 순자가 숲을 발견하고 미나리를 심으며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찾았던 것처럼, 나는 이 계곡을 걸을 때마다 조금 덜 이방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낯선 땅에서도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그 길을 걷는 동안 조용히 마음에 스며들곤 했다.

Minari.jpg 영화 속 장면으로, 할머니 순자(오른쪽)가 “미나리, 참 좋다!”라고 외치는 순간을 담고 있다.


그리고 오늘, 겨울 속에서 이 계곡을 걸으며 나는 처음으로 부모님을 떠올렸다.

겨울의 계곡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오늘 처음 알았다.

눈 위에 서서 얼지 않은 물소리를 들으면서...

예전 산을 무척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산행의 으뜸 계절은 겨울이라고.

그 말을 나는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예순을 맞이한 지금, 먼 타국의 겨울 계곡을 걸으며 그 말을 비로소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놀랍게 느껴졌다.

한국에는 하이킹과 산책을 할 수 있는 곳이 넘쳐났지만, 나는 늘 바쁘게 살았다.

캐나다에 와서도 이렇게 보물 같은 계곡이 집 앞에 있었지만, 겨울에는 들어와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머니도 산을 참 좋아하셨다.

2년 전, 딸이 사는 캐나다를 보겠다며 먼 비행을 마다하지 않고 오셨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아쉬운 것은 이곳을 함께 걷지 못한 일이다.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 내가 이곳에서 살아가며 가장 사랑하게 된 이 계곡을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이곳을 보여 드리며, 나 역시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쩌면 어머니를 닮았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었을 텐데...

오늘 문득 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백수의 시간은

내가 조금씩 철이 드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Rosedale 6.jpg

겨울의 계곡에서는

얼지 않은 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렇게

나를 잠시 멈춰 세웠다.

나는 한동안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