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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Oct 20. 2022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것

사회생활에서 배우는 것들

아침에 출근하면 그날의 일정을 꼼꼼하게 메모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일단 당일 일정과 동향을 확인한 후 그날 소화해야 할 업무들을 상세하게 적는다. 그다음은 개인적으로 해결할 일들의 목록을 떠올린다. 구태여 적지 않아도 되지만 하나라도 놓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한 나만의 오래된 루틴이다. 


늘 빼곡한 일정을 소화하는 날이 자꾸 늘어난다. 행사도 하루에 한건 이상만 참여하는 걸로 마음을 먹지만 내 맘대로 조율이 잘 되지 않으니 3~4건씩 겹치는 힘든 날도 있다. 그럴 때마다 가족들은 피곤하지 않냐고 물으며 염려의 시선을 보내곤 한다. 


때론 나 자신이 고통이나 힘든 것을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아닌가 의심하는 날도 있다. 누가 봐도 피곤한 일정들을 이어가고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경우가 그렇다. 그럴 때마다 진짜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알면서도 모르쇠하고 있는 것인지 의아스럽다. 항상 피곤해야 쉬고 힘들어 더 버티지 못할 때까지 참다가 병을 키우면서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고 있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퇴근 무렵 아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유난히 말이 느리고 기운이 없으면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자마자 그날 있었던 여러 가지 상황들을 털어놓는다. 군말 없이 업무를 계속 소화했더니 자꾸 일이 늘어나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까지 이르렀다는 하소연이다.


 나 또한 그런 날들이 있었다. 상사들은 보통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 일을 자꾸 얹어준다. 잘 해낼 거라는 믿음 때문이지만 그 일을 계속 소화해내는 당사자에게도 한계점이 있다. 이번이 마지막이겠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자꾸 수용하다 보면 어느 순간 돌이키기 어려운 포화상태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아들에게 한 번쯤 상황을 정확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노라고 조언했다. 묵묵히 잘 해내고 있으므로 그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기고 계속 일을 얹어주고 있을 확률이 높다. 나이가 어려 경험이 부족하고 거절하기 어려운 여건 때문에 무조건 다 수용하다 보면 생각지 못한 부작용이나 문제가 초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직원들에게 꼭 하는 말이 있다. 업무를 처리하다 문제가 발생하면 절대 혼자 끙끙대지 말라는 것이다. 둘이 나누면 그 부담은 50%, 셋이 나누면 33%가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들이 밤새 어떤 결론을 내렸을지 아직 듣지 못했지만 이러한 경험들로 인해 그가 사회생활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 상사 또한 나쁜 마음으로 그랬던 것은 아니고 그가 충분히 소화해낼 역량이 있다는 판단하에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므로. 


나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힘들면 힘들다고 이야기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혼자 참아내거나 조금 손해 보면 다 지나갈 것이라고 여기며 고통스러워하는 일은 이제 그만하자. 지나친 이기주의라면 곤란할 수 있겠지만 가끔은 나를 위해 개인주의적인 사고나 판단도 필요하다. 사회 초년생인 아들 또한 직면한 문제들을 현명하고 지혜롭게 잘 풀어나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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