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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Mar 29. 2023

꽃잎 한 장처럼

사무실 담벼락에 주차되어 있는 차가 하얀 옷을 입었다. 만발한 목련나무에서 만개한 꽃잎이 하염없이 떨어져 차 위에 쌓이는 중이다. 나풀나풀 날라서 더 멀리 가고 싶을 만도 한데 자리 잡은 곳은 바로 아래에 있는 자동차. 미쳐 그곳에 안착하지 못한 꽃잎들은 아스팔트 바닥 위에 내려앉는다. 이내 사람과 차량들이 지나가며 아프게 상처를 줄텐데 하는 염려에 안쓰러운 마음이 앞선다. 이 순간 가장 궁금해지는 것은 꽃으로 단장한 차량 주인의 표정이다. 꽃잎으로 뒤덮여있는 차를 보고 황홀한 표정을 지을까. 이게 웬 날벼락인가 하며 짜증을 낼까.


나이를 먹는구나 하고 실감하는 때는 자연의 변화에 반응하는 내 모습에서다. 정호승 시인의 '첫눈'이라는 시를 읊어대며 이제나 저제나 첫눈을 기다리고, 그날은 누군가를 만나야 할 것 같아 설레고 있다면 아직 청춘이다. 이렇게 눈이 내리면 출근길에 어려움이 있을 텐데, 갓 세차한 차가 더러워질 텐데 하는 생각이 앞선다면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다. 비가 오는 날도 마찬가지다. 봄비가 내리면 봄비 핑계를 대고 가을날 비가 내리면 가을비에 구실을 붙여 좋은 사람들과 술을 마시러 갈 궁리를 한다면, 괜히 심난해진다면 아직 젊다는 것이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보면서 습한 느낌에 부르르 떨거나 구질구질해질 하루를 떠올리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면 나이가 들었다는 징표다. 


봄은 설렘의 상징이다. 출근길, 아파트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반기는 것은 긴 팔을 늘어뜨린 벚꽃나무이다. 인도 중간에 환하게 피어난 벚꽃은 뻗은 가지마다 화사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건넨다. 그녀의 뜨거운 환영을 받고 몇 걸음 옮기면 화단에서 부지런히 꽃을 피워낸 개나리와 진달래가 나 좀 바라보라는며 수선을 떤다. 굳이 먼 곳을 가지 않아도 봄이 되면 눈호강은 물론 마음까지 저절로 화사해진다. 어디로든 꽃구경을 가야 될 것 같아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것이다. 때가 되면 피는 건데 뭘 그리 수선을 떠느냐고 눈흘기며 지청구를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렇게 무덤덤하게 사는 삶은 너무 무료하고 건조하다.


잘 말라 뽀송한 속옷, 갓 구워낸 부드러운 빵, 등에 쏟아지는 따사로운 햇살, 언제 만나도 편안한 사람과 마시는 뜨거운 커피 한잔.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우리 주변에는 행복할 이유들이 즐비하다. 얼마 전 직장 동료가 통화를 하면서 좋은 일이 있느냐고 묻는다. 상투적인 질문일 것이다. 그가 말하는 '좋은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는 없지만 망설임 없이 밝은 목소리로 '그렇다'라고 답한다. 어떤 일이냐는 구체적인 질문에 '무해무덕한 일상이 좋은 일 아니냐'라고 되물었더니 이내 수긍한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다 내가 마음먹기 나름이다. 웃다 보면 좋은 일이 생기고, 좋지 않은 일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덧 나와 멀어지고 기쁜 일이 반겨준다.


나이가 들수록 감정은 무뎌진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그냥 다 모양도 깊이도 같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억지로 감정을 뽀송하게 만들기 위해 애쓸 필요까지는 없지만 보고 느끼는 일상에 온기를 담아 바라볼 일이다. 겨울을 힘겹게 이겨내고 밝게 웃는 꽃을 보면 반갑게 웃어주고 흩날리는 벚꽃을 보면 호들갑도 떨어볼 일이다. 

이해인의 시처럼 늦은 봄날 무심히 지는 / 꽃잎 한 장의 무게로/ 꽃잎 한 장의 기도로/ 나를 잠 못 들게하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우리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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