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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Apr 14. 2023

이별을 마주하는 방법

50여분 걸려 도착한 그곳, 향도 없을듯한 하얀 근조화환들이 제일 먼저 반긴다. 두리번거리며 빈소에 들어서니 첫날인데도 조문객이 제법 많다. 까만 상복을 입어 더 작아진 그녀가 웃으며 일행을 반긴다. 말끝에 자꾸 웃음을 웃는 그녀. 효행상이라도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아버지에게 지극정성을 다했던 그녀다. 며칠 전부터 목소리가 더 작아지고 톤도 낮아졌다. 이유를 물으니 아버지가 시골집 근처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말했었다. 지난밤 통화했을 때 식사를 전혀 못하신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럼에도 갑작스러운 부고다.


이별은 예고와 함께 우리 곁에 오기도 하지만 마음의 준비 없이 맞아야 할 때가 더 많다. 고령이지만 최근에 부쩍 많이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녀는 아마 이별을 예감했을 것이다. 자식들은 곁에서 생의 촛불이 사그라드는 순간들을 지켜보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을까. 90세를 훌쩍 넘긴 어른의 장례식장은 잔치집에 온 건가 하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호상이라 여기고 웃고 떠들면서 그를 보내는 분위기 탓이다. 나 또한 어느새 큰 소리로 웃다가 흠칫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나의 장례식은 이랬으면 좋겠다. 예고 없이 떠나서 아무 준비조차 못하는 이별은 아니었으면 한다. 너무 요란하고 시끄럽지도 않으면 좋겠다. 정말 나를 좋아했던 사람들만 여서 조촐하지만 정갈하게 마련한 음식을 나누고 나와 함께 나누었던 추억들을 되새기며 떠나보내주길 바란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군가에게 잊힌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짐은 없을수록 좋고 상상하기 싫은 일이지만 불가피하게 헤어져야 한다면 그들과 쌓았던 행복하고 따듯한 기억들과 말만 서로에게 오래도록 남아있으면 좋겠다. 지난한 삶을 살아내느라 하루에 단 한 번도 나를 떠올리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또한 서운해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다 촉촉하게 비가 내리는 어느 날, 곱게 핀 벚꽃 잎이 하롱하롱 날리는 날 문득, 아주 잠깐이라도 떠올려준다면 그 또한 기쁨으로 여길 것이다. 그것은 그 또는 그녀의 가슴 한편에 여전히 나의 흔적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다는 증거일 테니. 하지만 이 또한 떠나는 자의 과욕일 것이다. 함께 어우러져 사는 동안 행복했고 즐거웠다면 굳이 그 기억들을 붙잡고 있을 이유도 없는 까닭이다.


눈 내리는 겨울이면 아버지가 계신 집 마당에서 환하게 빛나는 너른 들을 내다보며 '여기가 가르뫼예요'라며 사진을 찍어 보내던 그녀. 늘 바쁘고 숨 가쁜 일정에도 고향에 계신 아버지를 자식처럼 살뜰하게 보살피던 따듯한 그녀의 마음이 애잔하다. 아버지가 쓰시던 닳아버린 수저만 바라봐도, 누군가 어깨가 좁아지고 구부정한 '아버지'와 동행하는 모습만 마주쳐도 눈가가 촉촉해질 것이다. 아니 환하게 웃으며 그와의 추억들을 상기하며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철없는 아이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문상을 하고 밥을 먹으면서 '장례식장 맛집'이라며 그녀에게 너스레를 떨어본다. '큰 며느리의 마지막 정성'이라며 서둘러 주방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녀. 새콤한 홍어회와 달큼한 시래기무침을 챙겨 들고 오는 그녀의 웃는 눈에 서운함과 슬픔이 진하게 묻어 있음을 다시 본다.


이별을 마주하는 일은 예고의 유무와 관계없이 늘 힘들다. 생각지도 못한 경우라면 그 체감도는 더 깊고 짙을 것이다.  그냥 눈물이 나면 그 슬픈 마음이 잦아들 때까지 울으면 된다. 누군가를 의식해 참을 필요도 괜찮은 척할 이유도 없다.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말하고 원망의 마음조각이 있다면 바로 쏟아내는 것도 좋다. 그 또한 그를 기억하는 한 방법이고 슬픔을 정리하는 선택일 것이다. 이제 그녀는 미지근한 온기로 집안을 가득 채우던 아버지의 체온을 그리워하며 하얀 눈이 내리는 '가르뫼 길'을 혼자 걷기도 하고 허전한 눈길로 내다볼 것이다. 그가 평생 사용해 손때가 묻어있는 물건들을 볼 때마다 그를 떠올릴 것이다. 한 시간 남짓 머물던 장례식장을 뒤로하고 다시 일상의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따라 유난히 봄바람이 차갑다. 그녀를 다시 만나는 날, 아무말 없이 그냥 그녀를 꼭 안아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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