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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Apr 26. 2023

난생처음 소백산!

소요시간 6시간이라는 등산코스 안내를 봤을 때 설마 하면서도 궁금증이 앞서 산우회 밴드에 덜컥 '참석합니다'라고 댓글을 달았고 그렇게 난생처음 소백산 등산을 감행했다. 알람에 맞춰 새벽 5시에 일어나 머위쌈밥과 유부초밥으로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고 필수품목인 멀미약을 챙겨 먹고 6시 30분에 출발. 비몽사몽 잠에 취한 채 대형버스로 3시간여를 달려 충북 단양 죽령분소에 도착했다. 아직은 싸늘한 아침 바람결에 몸을 움츠리며 '소백산 국립공원'이라는 안내판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드디어 대장정 시작.


예상대로 소백산은 초입부터 만만치 않았다.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여며진 길을 한 시간 남짓 오르기 시작할 무렵, 마음속에서는 짜증이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너무 빠르다. 이러려고 내가 새벽잠도 설치며 두 시간 넘게 고속도로를 달려왔단 말인가 후회해도 늦었다. 되돌아가는 코스가 아니라 도로 내려갈 수도 없는 탓이다. 어느새 다리는 무거워지기 시작했고 호흡도 거칠어졌다. 투덜대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뒷목까지 뻐근해진다. 등산하면 보약한재 먹는 것과 다름없다는데 이건 딱 무슨 병이 생걸 것 같은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내려가는 코스가 반대방향이라 도로 내려갈 수도 없는데 끝도 없이 이어지는 오르막길. "그래, 등산도 인생과 비슷하구나, 가다 보면 곧 평평한 길도 나오겠지" 주문을 걸며 꾸역꾸역 올라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1시간 20여분을 걸었을 즈음 멀리 관측소가 나타났고 드디어 고대하던 평평한 길이 시작됐다. 이제 좀 살만하다. 연화봉을 향하는 길이 비교적 평탄한 흙길로 이어지면서 툴툴거리던 입도 잠잠해졌고 조금씩 평안을 되찾았다.  토성, 목성, 화성이라는 안내판을 보면서 생겼던 궁금증도 소백산 천문대를 만나면서 풀렸다. 그렇게 또 얼마를 걷다 보니 연화봉 즈음에서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길 잃어버렸던 어린아이가 엄마를 만났을 때 기분이다. 11시가 좀 넘은 이른 시간이지만 점심 식사를 하는 분위기. 이내 스틱을 내려놓고 일행들 옆에 털썩 자리를 잡는다. 등산경력이 오래된 회원들은 보온 도시락에 방풍나물과 상추쌈, 김치볶음, 멸치조림 등 다양한 반찬까지 살뜰하게 챙겨 왔다. 나무 데크에 앉아 세상 편한 자세로 바람과 햇살을 맞으며 산에서만 즐길 수 있는 맛있는 식사시간이다. 그중에 단연 백미는 산에서 얻어 마시는 향긋한 커피 한 모금.


수다를 떨며 달콤하게 쉬는 시간도 잠시, 이내 오후 산행이 이어졌다. 얼떨결에 선두에 섰다가 등뒤에서 들려오는 자박자박 발자국 소리에 얼른 자리를 내주고 이내 뒤편에서 일행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평평한 길은 어느새 사라졌고 오르락내리락 계단이 반복됐다. 이미 한계점을 넘어 다리는 무거워지고 종아리는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 또다시 입에서는 볼멘소리가 무한 되풀이됐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내내 말없이 호흡을 맞추며 동행하던 남편은 오늘 산행코스를 일명 '순례길'이라고 명명해 준다.


걷기나 등산의 묘미는 걸으면서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마음을 차분하게 정리하고 복잡했던 일들을 갈무리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고수들에게나 가능한 일임에 분명했다. 바삐 걷는 틈틈이 휴대전화에 야생화를 부지런히 저장하며 즐거워하며 힘든 기색 없이 걸음을 옮기는 등산 고수들의 여유가 부러울 뿐. 걷기에 급급해 산행의 즐거움보다는 아픈 다리상태에만 더 집중하는 나 같은 초보에게는 그저 힘든 고행의 시간이다. 봄바람에 곱게 단장하고 손짓하는 앙징맞은 야생화들도 그저 평범한 들꽃이고 흔한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소백산은 철쭉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아직 때가 이른 탓인지 진달래가 이제 드문 드문 피어 있는 정도여서 아쉬움을 남겼다. 그렇게 오랜 오르막과 내리막길을 거쳐 산행에서 가장 어려운 코스라 불리는 마의 계단길을 지나 등산을 시작한 지 4시간 30분 만에 1,439m 비로봉 정상에 드디어 도착. 힘들지만 감격스럽고 세상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는 순간이다. 올라올 때는 분명 사람이 없었는데 정상 표지석에서 사진을 찍으려니 줄이 제법 길다. 꼭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어야 하냐는 남편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10여분을 넘게 기다려 완등 기념 인증사진을 찍었다. 물론 언제 투덜 렸나 싶게 아주 환하게 웃으면서.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하산코스는 달밭골과 삼가야영장을 거쳐 삼가주차장. 내려가는 길도 초보에게는 만만치 않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내리막길은 지루함의 끝판왕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의욕이 넘쳐 잠시 빠른 속도로 걸었을 때 문제가 생긴 것일까. 왼쪽 종아리에 가벼운 통증까지 시작되었다. 돌아갈 수 없으니 오른쪽 다리에 힘을 주고 걸을 수밖에. 계곡옆에 설치된 데크길을 따라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을 것 같은 하산길이 계속됐다. 걷기에 지친 등산 초보에게 시원한 계곡물소리도 낯선 풍경도 그냥 지루함의 연장일 뿐. 이건 너무한 코스 아니냐며 투덜거리며 두 시간쯤 걸었을 즈음 드디어 목적지인 주차장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산행하면서 걸은 걸음수는 무려 34,000보. 내 생에 이렇게 많이 걸었던 날이 있었던가.


무엇이든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1만 시간 이상이 필요하다고 한다. 매월 10여 년 넘게 묵묵히 산행을 해온 이들의 걸음걸이에는 숱한 땀과 인내가 배어있다. 종아리에 알이 배고 허벅지가 아픈 통증을 견뎌내고 또 걷고 걸어 비로소 산을 즐기는 지금의 경지에 도달했을 것이다. 다리를 질질 끌며 주차장에 도착하니 산우회장이 "다음 달 지리산도 거뜬하겠어"라며 환한 표정으로 반긴다. 1초의 망설임도 "다음 달에 안 올 거예요"라고 대답하고 서둘러 버스에 올라탔다.


"회장님, 다음 달 코스 지리산이라는데 재고해 주시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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