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람

by 정은숙

"엄마 좀 모자란 거야? 매번 같은 상황으로 피해 보면서 왜 거절을 못하는데"

매번 반복되는 비슷한 상황을 듣고 아이들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에게 쏟아놓는 말이다. 그러게, 근데 모른척할 수도, 거절도 못하겠는데 어떻게 해......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제법 많다. 평소에는 거의 연락이 없다가 본인이 필요한 경우에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 상식적으로 분명히 맞지 않는 일을 벌여놓고도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 본인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거나 제삼자의 지적으로 그 사실을 알게 되어도 사과 전화를 걸어와서는 "제가 몰라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줘야 한다"거나 "그 일이 실수인 줄 몰랐다"라고 말한다. 사과형식을 빌렸지만 본인의 잘못을 모른다. 문제는 비슷한 상황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매번 상대방에게 그런 식으로 피해를 끼친다는 것이다.


웬만하면 화내지 않으려 애쓴다. 거절하는 법도 서투르다. 아니 잘 못한다. 그러다 보니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매번 족쇄를 차고 만다. 그렇게 맡은 후 떼어버리지 못한 직책도 여러 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재현된다. 부탁하면 바쁘면서도 웬만하면 다 들어주다 보니 상대방은 아쉬울 때마다 도움을 요청하고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 것을 나 또한 모르지 않는다. 평소에는 연락이 뜸하다가 아쉬울 때만 손을 내미는 비슷한 상황이 반복된다는 것을.


성에 차지 않아 짜증이 나고 화가 슬쩍 일어나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좋아하는 것은 나도 모르게 잘 표현하지만 싫어하는 것은 내색하지 않으려 애쓴다. 어쩌다 표현해도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려고 애쓴다. 내가 이득 보려고 계산기를 두드리거나 잔머리를 쓰기보다 조금 손해 보면 편하다고 여기며 산다. 원래 성정이 그랬는지 아니면 34년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몸에 밴 습관인지 모르겠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많은 경우 서너 번까지 같은 부서나 팀에서 근무하기도 한다. 업무상 서로 도움을 요청하거나 협의할 경우도 많기 때문에 혹시나 껄끄러운 관계인 경우 난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정말 화를 내야 할 경우가 아니면 속은 부글부글해도 웬만하면 좋은 말로 마무리하곤 한다. 어디선가 예고 없이 만났을 때 불편한 상황이 재현되는 일은 안 만드는 것이 편하다고 믿는 까닭이다.


특히 여러 단체에 소속되어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생각보다 그런 상황들이 많이 발생한다. 특히 직책을 맡다 보면 본의 아니게 불편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충고 아닌 질책을 들어도 가끔은 못 들은 척 지나가기도 한다. 매번 모든 상황을 정리하려고 하거나 모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일이 더뎌지거나 배가 산으로 가는 경우가 발생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정말 다양한 부류의 사람을 만난다. 내가 경험한 가장 나쁜 사람은 상대방을 이용하는 사람이다. 겉으로는 타인을 배려하고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단지 자신을 빛나게 하기 위한 배경으로 여긴다. 필요할 때마다 미소를 지으며 도움을 청하고 소위 보조자로 데리고 다닌다. 그러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을 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면 바로 퇴출하거나 타인에게 험담을 한다. 자신이 그렇게 배려해줬음 에도 적반하장이라거나 너무 설친다거나. 그렇게 최악의 상황에 이르러도 조금이라도 이용가치가 있다고 믿으면 그 끈을 놓지 않는다. 상대가 도움을 요청하면 모른척하거나 거리를 두면서 말이다. 말 그대로 세상 착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정말 나쁜 사람이다. 나 또한 간접적인 피해자임에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하나씩 따지는 것도 불편하고 애매하다. 오랫동안 이어져온 인연에 종지부를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만간 한 번쯤은 홍역을 치러야 할 것이다.


밤사이 살포시 눈이 내렸다. 창 밖으로 보이는 천변이 하얀색으로 단장을 했고 햇살은 제 일을 하려는 듯 삐죽 고개를 내민다. 모처럼 아이들은 이른 외출을 하고 글을 쓰는 식탁에는 소설 한 권이 새침하게 누워있다. 나는 여전히 성선설을 믿는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함께 산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나쁜 사람으로 비추어지거나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조금이라도 바르게 사는 사람, 누군가에게 민폐보다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 상처를 주지 않는 편안하고 따듯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 스스로를 다독이고 재단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린 눈처럼 오늘은 세상의 모든 '나쁜'이라는 단어도 하얗게 변하는 기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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