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출장을 마치고 숨을 돌릴 무렵 오랜만에 지인의 전화가 걸려온다. 반가움에 벨소리가 두어 번 울리자마자 통화 버튼을 누른다. 마침 사무실 근처를 지나가는 길에 시간 되면 차 한잔 하러 오겠다는 내용이다. 오래전 단체에서 만나 알게 된 그와는 대화 코드가 비슷해 나이차이는 좀 있지만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전화를 끊고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가 사무실로 들어선다. 편안하고 여유로운 모습이다. 차 한잔을 우려 나눠 마시며 사소한 일상을 나눈다. 문득 그가 "요즘엔 글을 안 쓰나 봐요"라고 말한다. 그러게요 라며 인정하자마자 그나마 최근에 브런치에 올렸던 글 이야기를 언급하며 일상에서 좀 벗어나볼 것을 권유한다. 매일 일에 묻혀서 그 외에는 가족이나 지인들과 연관된 글들만 업로드되는 것이 안쓰럽다며 한 번쯤 훌훌 털고 혼자 여행을 다녀오면 좋겠다는 것.
되돌아보니 요즘 들어 유난히 마음이 어수선하고 골이 깊게 파인 날들이 많았다. 사무실 일정을 우선순위로 하다 보니 주말 시간도 별로 여유롭지 않다. 그러다 보니 모든 신경이 일과 사람에 쏠려 있다. 업무 성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에 실망하고 조목조목 따지고 보면 별스러운 일들도 아닌데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화가 난다. 별 의미 없이 대화를 주고받다가 살짝 삐져나오는 단어 하나 때문에 화를 삭이지 못하거나 그로 인해 상대방을 미워하다가 깜짝 놀라기도 한다. 나만의 잣대가 맞다는 기준을 높이 세워놓고 판단하고 오해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는 증거다. 말로는 비우고 내려놓겠다고 말하지만 그저 말뿐. 실생활에는 적용하지 못하고 여전히 전전 긍긍이다. 나이가 먹어도 그득한 욕심 주머니 탓에 작은 실수들을 실패라고 여기며 골머리를 썩는 것이다. 그탓인지 꿈자리도 편치 않다. 잠들기 전 몰입해서 시청한 드라마 탓이라고 우겨보지만 편치 않은 심리상태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리라.
이른 출근길, 오늘은 다른 날보다 더 천천히 운전하며 간간히 풍경을 해찰한다. 안개가 자욱한 먼발치의 계룡산과 하루를 준비하는 사람과 집들의 온기를 상상한다. 매사 불만과 불평 투성이로 하루를 채우고 있는 즈음의 내 얼굴이 떠오른다. 오래간만에 헬스장 러닝에 온몸이 무겁지만 특별히 아픈 곳도 없다. 여전히 맛있는 음식을 보면 군침이 돌고 나를 감성친구로 떠올리며 꾸준한 글쓰기를 응원해 주는 친구도 있다.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주절주절 풀어놔도 싫은 기색 없이 들어주면서 맞장구 쳐주는 사람도 있다. 침대 맡에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하루 종일 있었던 사무실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위로해 주는 아들, 똑같은 얘기를 여러 번 반복해도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해 주는 남편과 딸. 늘 큰딸의 안부를 걱정하며 어디 탈이라도 날까 노심초사하는 엄마까지.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분에 넘치고 행복한 일들이 널려 있음에 나도 모르게 진한 감사함이 스며든다. 그래 내가 지금 꿈꾸고 바라는 것은 아주 큰 성공도 분에 넘치는 부귀영화도 아니었지. 잠자리에 들 때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큰 걱정거리도 없다.
주차장에 주차한 후 언제나처럼 청사를 한번 둘러본 후 사무실 문을 열고 익숙한 공간으로 들어선다. 안녕하세요라고 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넨 후 컴퓨터를 켜고 일정을 체크한 후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오늘도 많은 사람과 일을 만나겠지만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사무실 문을 활짝 열어둔다.
이른 아침부터 민원처리를 위해 사무실을 찾은 어르신에게 웃으며 뜨근한 쌍화탕 하나를 건네드린다. 작은 마음에 햇살처럼 환해지는 어르신 표정에 나도 가슴이 저절로 따스해진다. 특별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아주 보통의 하루의 소중함을 떠올리며 새삼 삶에 경의를 표하는 날, 오늘도 이렇게 나는 삶이라는 페이지 속으로 힘차게 걸어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