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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똘리 Oct 05. 2022

이 놈의 방구석, 집 나갈 거야!

러시아에서의 나의 일탈들


이렇게 우리의 신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러시아어가 안 돼서 하루 종일 겪는 일상생활의 힘듦으로 인해 공부는 해야 하고 그 와중에 해결해야 할 일들은 많고 러시아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거기에 남편이랑 사이가 안 좋을 때면 방에 있는 게 너무 답답했다. 그래서 나는 몇 번 방을 나갔다.


방구석을 나가도 갈 데가 없잖아?

러시아어도 못 하고 아는 사람도 없고 우리나라처럼 카페가 발달되어 있는 것도 아니니 사실 기숙사를 나가봐야 갈 곳은 없었다. 그래도 어디 가서 코에 바람이라도 쐬고 오면 기분은 나아졌다.


우리는 사이가 안 좋을 때면 종종 밥을 거르는 날이 있었다. 밥을 해줘도 남편이 먹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나도 굳이 힘을 들여 밥을 하고 싶지 않았고 입맛도 없었다. 그러다 그 조용한 시간이 흘러 밤이 되면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한다. 하루는 남편이 배가 많이 고팠는지 혼자 방에서 라면을 끓여 먹을 준비를 했다. 라면 포트가 수증기를 내뿜으며 콸콸거리고 있을 때 마침 퍼지는 라면 냄새. 기분도 안 좋고 자존심에 같이 먹고 싶다고 말도 못 하겠는데 라면 냄새는 못 참게 맛있어서 그냥 쿵쿵 거리며 방을 나갔다. 기숙사 계단을 오르내리는 게 나의 운동이었던 기간이라 16층부터 8층까지 쿵쿵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


계단 말고 다른 아지트

그다음 내 일탈은 기숙사 9층에 있는 공부방을 가는 것이었다. 거기는 러시아 학생들이 친구들이랑 과제를 하거나 공부를 하는 곳이다. 거기 한가운데 책상에 자리 잡고 앉아 나도 공부를 했다. 러시아인들은 어려운 과목을 공부 중이었지만 그 한가운데에서 나는 '너는 어디에 가니? 나는 도서관에 가. 이것은 내 책이야.'를 읽으며 쓰고 있으니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뭐 어쨌든 그 아이들은 나한테 관심도 없었고 '나는 외국인이니까' 하며 괜히 한국에 있는 친구한테 연락을 하기도 했다.


기숙사 앞 호수

남편도 가끔은 한 방에 있는 게 답답했는지 혼자 기숙사 앞에 있는 호숫가를 뛰고 오는 것 같았다. 기숙사 바로 앞에 큰 호수가 있는 공원이 있었는데 달리기 좋게 잘 만들어져 있다. 그래, 여기 호수 말고 갈 데가 어디 있어..


나의 가장 큰 일탈, 근데 몰랐다고?!

러시아 3년 살이 통 틀어 나의 가장 큰 일탈은 혼자 집을 나가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고려인 식당에서 비빔밥을 먹은 것이다. 그날도 우리 사이엔 적막만 있었고 남편은 입을 다물고 침대에서 자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그래도 남편을 기분 좋게 해주고 싶어서 남편의 최애 메뉴 김치찌개를 끓여놓고 나는 방을 나가기로 결심했다. '내가 밖에 나갔다 오면 남편도 혼자 김치찌개를 먹을 것이고 그러면서 돌아오지 않는 나를 걱정하겠지? 그리고 그때쯤이면 마음이 풀리겠지'라는 생각으로 집을 나갔다.


그 고려인 식당은 처음 러시아에 도착했을 때 우리의 구원자님이 알려주신 곳인데 대충 기억을 더듬어 조금 긴장되었지만 찾아갔다. 러시아어로 혼자 식당에서 주문해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받기도 전에 나는 "아딘 비빔밥 (아딘 один:하나)"이라고 말했고 다행히 더 이상의 러시아어는 필요하지 않았다. 남편을 집에 두고 혼자 맛있는 비빔밥을 먹었어? 할 수 있지만 어차피 그 식당 비빔밥은 남편이 좋아하지 않았다. 한국 비빔밥과는 또 다르게 특유의 향이 있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오이가 많다. 남편은 오이를 못 먹는다.


그 식당은 테이블이 8개 정도만 있는 정말 작은 지하 식당이다. 거기에 혼자 앉아 벽에 걸린 작은 티비를 멍하니 보며 비빔밥을 기다렸다. 그리고 혹시나 내가 혼자 밥을 먹다가 그 구원자님을 만나진 않을까, 왜 혼자냐고 물어보시면 싸워서 집을 나왔다고 해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비빔밥이 무사히 잘 나왔고 그렇게 나는 남편에 대해 화가 나는 마음과 아는 분을 만날까 두근거리는 마음과 함께 '여기 비빔밥은 참 맛있군' 하며 하하호호 웃는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밖을 나오니 7시인데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집에 혼자 가려니 조금 무서웠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도 괜히 무서웠다. 그래도 콧바람도 쐬고 비빔밥도 먹고 혼자 무언가를 했다는 사실이 뿌듯하면서 기분이 나아졌다. 그리고 남편을 떠올리며 지금쯤 일어나서 나를 걱정하고 있겠지? 하며 기숙사로 열심히 향했다. 기숙사 앞에 도착해서 올려다본 우리 방은 불이 꺼져있었다. 뭐야, 걱정은 무슨 아직도 자는 거야?!!

그리고 방에 들어가니 그제야 일어나서 눈을 비비며 어디서 오는 거지? 싶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내가 집을 나갔다 들어온 건지도 모르는구만! 야심 찼던 나의 일탈은 나만의 추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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