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성격을 말하자면 조심성이 없다. 근데 겁은 또 엄청 많아서 위험한 일 같은 건 절대 하지 않고 내 몸을 지키는 행동은 매우 조심스럽다. 여기서 조심성이 없다는 건 물건을 수시로 떨어뜨리고, 깨뜨리고, 물건을 집에 놓고 나온다거나 하는 덤벙대는 모습을 말한다. 이건 평생 고칠 수 없는 병이라 생각했는데 옆에서 미리 주의를 주는 남편과 살다 보면 어느 정도는 고쳐진다. 아무튼 러시아 신혼 생활에서 남편의 기분을 다운시키는 상황 중 50%는 아마 이런 순간들이었을 것이다. 아내가 실수로 그런 건데 남편이 화를 내? 싶기도 하지만 이 이야기들을 보면 또 고개가 끄덕여진다.
토마토소스를 기숙사 로비에 엎었다
학교 갈 준비를 다 하고 각자 손에 1층에 버릴 쓰레기들을 들고 방 문을 닫고 나왔다. 내 손에는 유리병으로 된 토마토소스 2병과 또 다른 쓰레기 봉지가 있었다. 남편이 불안해 보인다고 쓰레기라도 달라고 했는데 내가 다 들 수 있다고 우기는 바람에 내가 다 들었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나는 토마토소스 병 한 개를 다른 한 개 위에 올려 쌓았다. 손으로는 밑에 있는 병만 잡았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싶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고 나는 내릴 생각만 하고 내렸다. 그 순간 위에 있던 병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엄청난 소리와 함께 깨졌다. 평소엔 그 토마토소스 병 내부를 다 씻어서 버렸는데 왜 하필 그날은 병을 씻지 않고 버리려 했는지 아무튼 병이 깨지면서 병에 남아있던 소스들이 사방에 튀었다. 남편은 바로 뒤를 돌아봤고 바로 주저앉아 사건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휴지와 쓰레받기를 가지러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올라갔다 왔다. (우리 방은 16층) 그 사이 남편이 벌써 사건을 어느 정도 수습해두었다. 그렇게 한바탕 아찔한 아침을 보내고 남편이랑은 아무 말 없이 학교에 갔다. 그날따라 버스도 늦게 와서 아마 남편은 더 화가 났을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방으로 잠깐 올라간 사이 1층에 있는 관리 아저씨가 남편에게 뭐라고 큰 소리를 화를 냈다고 한다. 남편 입장에선 본인 잘못도 아닌데 바쁜 아침에 그걸 치우고 있으면서 욕까지 먹으니 기분이 단단히 상했던 것이다. 이건 정말 지금 생각해도 몇 번은 허리 굽혀 미안하다고 해야 할 사건인 것 같다.
문제의 그 1층 로비
교통카드를 놓고 왔다
아침 등교 준비는 늘 바빴다. 기숙사에서 학교까지 넉넉잡아 한 시간은 걸렸고 학교로 바로 가는 버스는 배차 간격이 길었다. 그래서 8시에 오는 버스를 놓치면 큰일이었다. 우리는 종종 아침에 서두르지 못해 버스 정류장까지 전력질주를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날도 남편이 먼저 앞으로 가서 전력 질주를 하던 날이었다. 나도 남편을 따라 뒤에서 목에서 피맛을 느끼며 뛰고 있었는데 순간 교통카드를 갖고 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또 아찔한 순간이었다. 남편이 버스를 겨우 잡아서 얼른 타라고 해맑게 웃으며 나한테 손짓을 하는데 나는 너무 미안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미안해, 나 카드를 놓고 왔어, 먼저 가" 해맑게 웃던 남편이 한순간에 표정이 굳었다. 정말 그 남편의 세상 해맑은 표정을 본 사람이라면 미안함에 몸 둘 바를 모를 것이다. 그렇게 다시 나는 방에 올라가 카드를 챙겨 왔고 우린 결국 조금 지각을 했다. 남편은 학교를 가는 길에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처음엔 내가 미안하다고 기분을 풀어주려 했지만 도통 풀리지 않으니 나도 화가 났다. '아니 내가 기다려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먼저 가라고 했는데, 왜 먼저 안 간 거야?! 먼저 갔으면 남편은 지각 안 했을 텐데! 기다려서 같이 갈 거면 화를 내지 말던가.' 그래도 그 순간에도 아내 걱정에 학교를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었겠지?
겨울엔 이렇게 버스가 전구를 달고 다닌다
이 외에도 내가 저지른 일들은 몇 개 더 있다. 남편이 화가 날 수 있는 상황인 이유는 늘 시간이 없을 때 일어난 일들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여유로울 때야 너그럽게 이해해주겠지만 빨리 학교를 가야 하는 등교시간에 주로 많은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복도에 밥통을 엎었다
아주 배고픈 시간, 볶음밥을 먹으려고 공용 부엌에서 재료를 겨우 다 볶았다. 전기밥솥은 방 안에 있어서 이제 그 밥솥이 해 준 다 된 밥을 들고 부엌으로 가서 프라이팬에서 볶기만 하면 끝이었다. 남편에게 자신 있게 "이제 다 됐어, 조금만 기다려~" 하고 밥통을 손에 들고 우리 방을 나섰다. 그리고 난 우리 방을 나가자마자 문 앞에서 밥통을 엎었다. 내가 나가자마자 퍽! 소리가 나니까 남편이 바로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남편이 뭐라 리액션을 취할 새도 없이 내가 세상 불쌍한 표정을 하고 복도에 쭈그려 앉아 쳐다보니 남편도 할 말을 잃었다. 나 자신한테도 스스로 너무 화가 나고 속상했다. 소리 내서 이이잉 우는 표정을 지었는데 정말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흘렀다. 내가 배고픔을 참으며 어떻게 요리하고 밥솥의 밥이 다 되기를 기다렸는데! 이제 이 밥만 잘 푸면 되는 거였는데! 이제 5분 안에 밥을 먹을 수 있었는데! 괜히 그동안 힘들었던 설움이 그 밥통한테 다 몰려서 너무 슬펐던 날이다. 이 날 만큼은 남편도 괜찮다 해주며 복도에 떨어진 밥을 주워 담아줬다. 그렇게 다시 밥솥을 기다리며 40분을 보냈다.
문제의 그 복도
남편은 나처럼 물건을 떨어뜨리지도 않고 항상 앞 일을 미리 생각하고 조심하는, 그리고 계획대로 진행되는 걸 좋아하는 완벽주의자인데 나 같은 덜렁이를 만났으니 자신의 계획에 없던 일들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조차 나 자신한테 화가 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