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부른다

새순의 여린 속살 같은 부드러움으로 자박자박 건너오세요

by 수필가 백송자

봄을 부른다



당신이 오면 함께 하고 싶은 게 많습니다. 겨울을 이겨낸 꽃망울이 용기 내어 뽀얀 얼굴을 보여주듯 그러고 싶습니다. 설레는 마음을 가득 담아 그대 손을 꼭 잡으면 메말랐던 온몸은 이내 곧 따스함으로 물들겠지요.


연둣빛 새순도 쑥쑥 올라옵니다. 그 새순의 속살을 어루만지며 바라보는 세상은 덧칠하지 않은 순수함이 베어납니다. 세속에 찌들지 않은 순박한 표정으로 하늘을 보고 들로 나갑니다. 콘크리트 구조물이 없는 드넓은 곳에서 당신과 둘이 속닥속닥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시샘하던 새들도 잠시 내려와 퉁을 치다가 가던 길을 놓치고 허둥대며 소리 지르겠지요.


햇살 퍼지면 냉이와 쑥을 캐다가 손을 털고 콧노래 부르며 당신을 빤히 쳐다봅니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합니다. 때 묻지 않은 시절이 내게도 있었지요. 그냥 무엇이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부풀곤 하였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허기지지 않는 그런 날이었어요.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해가 뜨고 해가 지고 그랬지요. 그러다가 머리가 커지고 사물을 바라보는 각도가 달라지면서 세상물이 옴팡지게 들었습니다.


그것이 맑고 깨끗한 이슬 같은 거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대부분이 구정물이었습니다. 처음엔 그 물이 칙칙하고 더러워 고개 돌리더라도 어느 순간부터는 발에서 시작하여 머리끝까지 온몸을 담그고 있었어요. 심지어 남의 팔을 끌어당겨 함께 적시자며 옆자리에 앉혔지요. 세상은 다 이렇게 흙탕물 속에서 뒹굴며 살아가는 거라고 스스로 위로했습니다. 맑은 시냇물의 청량함은 그저 기억 속에 가둘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순耳順에 들고 보니 혼탁한 세상물을 빼고 싶은 간절함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수렁인 줄도 모르고 한 발 한 발 더 깊게 빠지며 자신을 옭아매었던 욕망과 허영을 던져 버립니다. 작은 것 하나에도 속을 들여다보면 위선과 이기심도 많았어요. 상대방을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내 욕심을 가득 채우고 시치미 뚝 떼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그 많은 얼룩을 걷어내야 할 때입니다. 고것이 단단하고 두꺼워 힘은 들겠지만, 포기하지 않는 뚝심은 아직 내게 남아 있습니다.


당신이 도와주면 조금은 쉬울 것도 같아요. 그대가 묻겠지요. 내가 어찌하면 좋겠수? 그냥 내 앞에 와서 당신의 존재를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됩니다. 처진 내 어깨 한번 슬쩍 감싸주면 더 좋겠지요. 당신을 통해 순환의 고리를 가진 자연의 섭리를 다시 배웁니다. 가면 오는 것, 엄밀히 따지면 간 것이 그대로 되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소멸과 생성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지요. 이제 세상은 고운 물결이 일렁이면 좋겠습니다. 그 물살로 나도 당신 속에 파고들고 싶습니다.


당신 품속은 언제나 따스합니다. 아이였을 때는 어머니 품이 세상의 울타리였습니다. 어떠한 비바람도 다 막아주었지요. 어른이 되어서는 어머니 품속으로 파고들지는 못하였지만, 늘 그 자리에 오래된 느티나무처럼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움으로만 가득합니다.


올해는 당신을 더 많이 부르며 기다렸습니다. 지난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 추웠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온통 얼어 겨우내 녹지 않았지요. 작년 이맘때쯤 당신은 생명의 불씨를 살리며 세상 구석구석을 밝혔습니다. 그늘진 곳에서 숨죽이고 연명하던 것들도 당신 손짓에 기지개를 켜며 소생하였습니다. 그대 오는 길목에서 엄마도 구부러진 몸을 펴며 당신을 마중하리라 굳게 바랐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당신이 오는 줄도 모르고 먼 길 떠났습니다. 엄마가 혼자서 외롭게 가는 길을 그대가 배웅하였지요. 그 길이 고난의 연속은 아니었는지 당신 붙들고 묻고 또 묻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대답해 줄 수 없는 길임을 내가 어찌 모를까요.


당신 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손끝으로 맑은 물을 튕기듯 그대의 존재를 어루만집니다. 언젠가는 서쪽 깊은 곳에서 발걸음 소리도 알아채지 못하고 저물다가 소멸하겠지요. 혹여 그런 날이 오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은 오롯이 당신 생각으로 메마른 가슴을 채우렵니다. 그대에게서 받은 온기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마음을 여밉니다.


당신을 부를 때마다 내 마음에는 봄이 먼저 와서 기다립니다.



<작가메모>


혼란과 아픔 속에서도 봄의 시간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혹독한 겨울이 있기에 봄이 간절하고 자주 봄, 봄을 불러봅니다. 인생의 봄날은 저만치 멀어진 지 오래입니다. 이에 기죽지 않고 봄빛을 걸어두고 꿈의 씨앗을 심습니다. 그 씨앗은 만만치 않은 곳에서 어렵사리 싹을 틔웁니다. 잉태와 탄생이 이어지는 세상은 봄물이 들고 연둣빛 생기가 돕니다. 여린 순은 바람과 햇빛을 안고 연두에서 초록을 지나 녹음으로 분주할 것입니다.

겨우내 봄을 기다리다가 막상 화신花信을 받으면 얼떨떨할 때가 있습니다. 봄은 희망이요 꿈이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청춘의 봄은 아니지만, 봄을 맞이하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그리하여 봄이 시작되기 전부터 마음은 들떠 있고 기나긴 겨울이 춥지 않습니다.

지난 몇 년은 봄이 오는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그저 날이 따듯하여 봄이구나, 라고 여겼습니다. 부모를 다 떠나보내고 나면 몸도 마음도 허허롭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세월이라는 게 참 고맙습니다. 단단하기만 하던 이별의 슬픔에 틈이 생기고 농도마저 묽어집니다. 이제는 봄이 오면 부모님 계시는 곳에 가서 봄빛을 쬐며 웃습니다.

올봄은 새순의 여린 속살 같은 부드러움으로 자박자박 건너오면 좋겠습니다. 편 가르지 않고 모두의 마음에….


-수필과비평 2025.3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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