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맨몸으로 채색한 수채화다
밀밭이다. 자연이 맨몸으로 채색한 수채화다. 너른 밀밭에 서면 자연과 인간이 함께 호흡하는 숨결이 있다. 통통하게 익어가는 밀알의 애씀을 서로의 숨결로 어루만져준다.
대전광역시 유성구 교촌동 산19-11번지 일대에 밀밭이 조성되었다. 미래의 나노· 반도체 국가산업단지 인근이다. 대전의 명물, 성심당이 주인이다. 유성에서 진잠 가는 도로에 인접한 들이었지만, 야트막한 언덕이 있어 그동안 잘 보이지 않았다. 울타리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접근 불가 지역이었는데 얼마 전 빗장이 풀렸다.
도로와 아파트 사이에 있는 산책길을 따라 밀밭 앞에 선다. 가슴이 뛴다. 두근두근, 잠재우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다. 다 자란 밀을 일부 베어내고 길을 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면 꽉 차는 좁은 길이다. 밀은 꽃과 풀과 나무의 향기를 품고 주변 산하를 꿈의 정원으로 물들이며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보릿고개를 넘기며 밀이 익어가길 바라던 농부의 소망이 시대를 질러와 바람결에 흔들린다.
부동산이 들썩인 적 있었다. 모기업이 땅을 사서 무엇을 한다더라, 하면서 카더라 소문이 날로 거세었다. 돈 냄새를 맡은 투기꾼들이 몰렸다. 주변 아파트와 상가 그리고 땅값은 치솟고 동네는 시끄러웠다. 교촌동 일대는 떼를 지어 구름처럼 떠다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만 해도 모기업의 정체는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밀밭의 쓰임새가 언론에 보도되었다. 성심당에서 우리 밀 품종인 황금알을 파종하였으며 밀밭 축제를 열고 수확한 밀로 대전 빵을 만든다는 등 다양한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을 접하면서 별빛 흐르는 밀밭을 상상하며 밀이 곧게 자라기를 기다렸다.
어릴 적 시골에는 밀밭이 많았다. 무서움을 몰랐던 나는 방과 후에 도서관에서 책을 보거나 놀다가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등교할 때는 학교에 늦지 않기 위하여 늘 바빴다면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 길은 여유로웠다. 겨우 소달구지 하나 지나가던 길, 고요했다. 까치가 소식을 물어오고 도깨비불이 번지는 이야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삐삐를 불며 지나던 길이었다. 때로는 좁은 길을 가로지르는 미물의 날쌘 동작에 소름 돋았다. 해가 지고 사방이 어두워지는 찰나를 함께 느끼며 걷는 시간이 쌓이고 쌓인 층이 내게는 바로 문학적 상상력의 중심이다.
별이 반짝이고 달빛이 흐르는 시각까지 차마 발길을 재촉하지 못했다. 꼬르륵 꼬르륵, 허기가 몰려와도 마음은 온갖 생각으로 부풀어 올랐다. 돌아보면 순수하게 영혼이 영글어가던 시기가 이때였다. 꿈속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이다. 기회가 된다면 그 시절 그 시각에 꼭 다시 걸어보고 싶은 길이다. 그 흙길은 현재 온데간데없고 아스팔트 포장길이 넓게 있을 뿐이다. 또한 밀밭은 보이지 않고 비닐하우스로 뒤덮인 들판만 보인다. 무엇보다 동구 밖에서 기다리던 부모님은 용케도 막내딸의 발걸음을 알아채고“자야” 하며 황급히 다가왔었는데, 고향 산천에 계신 지가 수년이다. 모두가 떠나고 휑한 시골길의 풍경을 이곳 성심당 밀밭에서 가슴으로 보고 듣고 말한다. 따듯하다는 말이 어울린다.
바람이 불면 밀밭에서는 수런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그 소리는 나지막하게 건너오다가 곧 폭포수처럼 강렬하다. 소리를 모으고 집중한다. 밀을 수확하여 방앗간에서 갓 빻아 온 밀가루를 치대어 가마솥에 베 보자기를 깔고 빵을 쪄내던 어머니의 모습을 수묵화로 그린다. 마당 멍석에서 별똥별을 바라보며 먹던 빵 냄새에 취한다. 밀밭에서는 밀이 익어가고 내 마음에서는 그리움이 듬뿍 발효된 빵을 만들고 있다.
조용히 다가가 오동통하게 익어가는 밀알을 만진다. 싱그러움이 가득 밀려온다. 밀밭 속 깊숙이 들어가 있으면 어머니 품인 듯 포근하다. 조만간 성심당에서 빵 복합테마파크로 밀밭이 시민에게 공개될 것이다. 많은 시민이 이곳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으면 좋겠다. 콘크리트 벽에 갇혀 지내는 현대인들에게 밀밭은 모난 모서리의 차가움을 지우는 장소가 될 것이다. 자연과 함께하는 부드러움은 미움과 분노를 누그러뜨리며 기쁨과 인내를 동반하고 훈훈한 사회를 만든다.
향교가 있어 교촌동이라 불린 동네는 따듯한 빵 내음이 끊이지 않고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람으로 잇는 공간으로 거듭날 것이다. 새롭게 변모할 마을의 중심은 한 알의 밀알이 씨가 되고 곡식을 거두는 삶으로 모아지면 좋겠다. 가난과 배고픔으로 빵 한 덩이를 훔친 장발장의 현실적 비애는 많이 사라진 시대다. 밀가루 2포대로 대전역 앞 노점에서 천막을 치고 시작한 성심당은 그간 나눔의 가치를 실현하였다. 해돋이부터 해넘이까지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는 성심당의 사랑이 밀밭에서 무량하게 익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