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깊숙이 묻힌 함정
## 입주 체크리스트의 늪
입주를 앞두고 확인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하나라도 놓치면 개교에 차질이 생길 수 있는 중요한 사항들이었다.
첫 번째로 학내망 구축 상황을 확인해야 했다. 인터넷이 없는 학교는 그냥 큰 건물에 불과하다. 모든 행정업무가 온라인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네트워크가 구축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각 교실과 특별실까지 유선 네트워크 구축은 물론이고, 무선 AP 설치 상황까지 꼼꼼히 점검해야 했다.
두 번째는 행정실과 교무실 비품 납품 상황이다. 책상 하나, 의자 하나까지 직접 확인해야 한다. 행정실장 책상 위치부터 직원들이 사용할 사무용품까지, 하나하나 점검하며 최적의 업무 환경이 구축되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세 번째로 당직용역 계약이 완료되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24시간 학교를 지킬 파수꾼이 필요하다. 신설학교는 아직 시설이 완전히 안정화되지 않은 상태라 더욱 세심한 관리가 요구된다. 단순한 야간 순찰뿐만 아니라 각종 기계설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있는 분인지까지 확인해야 했다.
네 번째는 당직실 침구류 준비 상황이다. 당직기사님이 밤을 새워 학교를 지켜주시는데, 최소한의 휴식 공간은 제대로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깨끗한 침구류와 기본적인 생활용품까지 준비되어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다섯 번째로 가장 중요한 소방사용승인을 확인해야 했다. 이게 없으면 법적으로 한 명도 건물에 들어갈 수 없다. 모든 소방시설이 정상 작동하는지, 비상구는 제대로 확보되어 있는지, 소방차 진입로는 문제없는지 하나하나 점검 결과를 확인해야 했다.
여섯 번째는 정수기 설치 완료 여부다. 물 없이는 하루도 버틸 수 없다. 각 층마다 적절한 위치에 정수기가 설치되어 있는지, 급수 배관 연결부터 전기 공급, 배수 처리까지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일곱 번째로 냉난방 시설 점검 결과를 확인해야 했다. 사계절 내내 견뎌야 할 공간이다. 각 교실의 에어컨이 정상 작동하는지, 난방 시설은 문제없는지, 중앙 제어 시스템은 제대로 연결되어 있는지 점검 결과를 꼼꼼히 살펴봐야 했다.
여덟 번째는 화장실 사용 가능 여부 확인이다.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이다. 각 층 화장실의 급수, 배수 상태부터 변기와 세면대 정상 작동, 화장지 걸이, 비누 디스펜서 같은 작은 것들까지 하나하나 확인해야 했다.
아홉 번째로는 오전 중 임시사무실을 정리해야 했다. 지난 한 두 달간 치열하게 업무를 봐온 공간의 흔적들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필요한 것들은 박스에 담아 본 사무실로 이동할 준비를 완료해야 했다.
마지막 열 번째는 오후 본 사무실로 이사하는 것이다. 드디어 진짜 학교의 정식 사무실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새로 구축된 행정실과 교무실로 모든 짐을 옮기고, 각자의 자리를 잡으며 정식 업무를 시작할 수 있는지 최종 확인해야 했다.
이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준비되어야 비로소 진짜 학교로서의 첫걸음을 뗄 수 있었다.
## 땅속 깊은 곳에서 올라온 악몽
"띠리리리링!"
임시사무실에서 열심히 업무를 보고 있던 오후, 갑작스러운 전화벨이 울렸다. 학내망 구축업체 대표님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급박했다.
"실장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세요?"
"KT에서 인터넷선 매립 작업을 하러 왔는데, 공사팀이 그냥 철수해 버렸어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뭐라고요? 왜요?"
"인입로가 파손되어서 매립을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21세기에 그런 일이 가능할까? 곧 학교로 입주해서 전입학 신청도 받아야 하고, 교무 업무도 시작해야 하는데...
## 지하 미궁의 진실
학내망 구축업체 대표님이 상황을 확인해 본 결과, 근처 아파트 건설업체가 공사 중에 인터넷 인입로를 파손시켰고, LH는 그 상황을 모른 상태에서 도로포장을 해버린 상황이었다.
급하게 정부지원과에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담당자도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뾰족한 해결책이 없는 상황이었다. LH사무실은 전화도 받지 않는 상황이다.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LH 검단신도시 임시사무실의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단드림로 옆 임시건물에는 젊은 담당자 한 명과 보조 직원 한 명만 있었다. 그나마도 계속되는 업체와의 회의 때문에 전화받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도로명 안내판 협의 때문에 찾아갔을 때의 기억이 생생했다. 그때도 담당자를 만나기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 직진의 힘
"이렇게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나는 임시사무실을 박차고 나와 LH 사무실로 직행했다.
신설학교 행정실장의 운명이란... 정말 별의별 일을 다 해야 한다. 확인해야 할 사항은 명확했다.
1. 인입로 파손 정도는?
2. 굴착 작업이 가능한가?
3. 언제까지 복구 가능한가?
한시가 급했다. 학교 입주가 미뤄지면 모든 계획이 도미노처럼 무너진다.
## 예상치 못한 반전
LH 담당자는 놀랍도록 태연했다.
"굴착허가요? 그건 바로 허가 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향후 대책까지 수립되고 충분히 검토되어야 허가가 나거든요."
더 충격적인 건 그가 현재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LH 담당자 앞에서 전화를 받았다.
"실장님, 지금 어디 계세요?"
"LH 검단사업소에 와 있는데요?"
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인입로 파손 복구는 저희가 주말에 해놓겠습니다. 대신 지금 LH에 말하면 공사를 못해요. 실장님이 빨리 복구를 원하신다면... 처신을 잘하시길 바랍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뇌리에 번개가 쳤다. '불법 굴착을 통한 복구'라는 뜻인가?
눈치 없게도 LH 담당자가 끼어들었다.
"인입로 파손이요? 저도 처음 듣는데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혼자서 결정해야 할 순간이구나. 나는 재빨리 판단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상황 파악을 잘못한 것 같아요.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LH 사무실을 나왔다.
밖으로 나와 다시 그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LH 담당자에게는 오해라고만 했습니다.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세요."
"저희도 하청업체인데 이런 굴착을 전문으로 하고 있어요. 걱정 마세요. LH에 보고하면 공사가 한 달은 걸립니다. 실장님이 올바른 선택을 하셨어요."
"이번 주말에 공사를 완료해 놓겠습니다. 월요일에 다시 인터넷선 매립하시면 됩니다." 정부지원과에 일련의 과정을 보고하니 "한번 믿고 기다려보자"는 답변뿐이었다.
주말 동안 가슴을 졸이며 기다렸다. 월요일 아침, 기적이 일어났다.
공사가 완벽하게 끝나 있었고, 학내망 설치도 문제없이 완료되었다.
갑자기 터진 문제가 갑자기 해결되는 기분...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진실은 더욱 감동적이었다.
## 보이지 않는 손길
전화번호도 모르는 하청업체가 어떻게 내 번호를 알고 적절한 타이밍에 연락했을까? 그 뒤에는 사람이 있었다. 학교 학내망 공사부터 정보교구 구입까지 도움을 주던 업체 대표님이 사안이 터지자마자 즉시 수소문을 시작했다. 근처 업체들을 뒤져서 하청업체를 찾아내고, 나에게 연락하라고 직접 지시해 주신 것이었다.
"대표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역시나 예상대로, 이 대표님과는 2년 뒤 2기 신설학교에서도 또 함께 일하게 되었다. 위기는 때로 새로운 인연의 시작이기도 하다. 지하 깊숙이 묻힌 함정에서 건져 올린 것은 단순한 해결책이 아니라, 평생 갈 소중한 동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