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미발표 원고: 사라진 창작물 70년만의 귀환
오래된 책장 뒤에서 발견한 먼지 쌓인 노트. 할아버지의 검정색 만년필 글씨가 빼곡히 채워진 그 노트는 내게 한 편의 서사시처럼 다가왔다. 작고하신지 십 년, 나는 할아버지가 평생 동안 그림 뿐만 아니라 소설가의 꿈도 함께 품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다로 가는 기차"라는 제목의 그 원고는 해방 직후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청년의 이야기였다. 출판을 앞두고 있었으나 여러 사정으로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채 서랍 속에 묻혀 있던 할아버지의 꿈인것 같았다. 원고를 읽어내려가며 나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이 글의 주인은 누구인가? 작고한 할아버지? 유품을 물려받은 우리 가족? 아니면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망각의 영역?
저작권법에 따르면 창작물은 창작자가 사망한 후에도 일정기간 보호받는다. 할아버지의 원고는 법적으로는 여전히 보호받는 창작물이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생전에 이 작품에 대한 어떤 저작권적 의사도 남기지 않으셨다. 출판을 원했을까, 아니면 영원히 비밀로 간직하고 싶어했을까? 이런 미발표 원고에 대한 권리와 책임은 후손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저작인격권"이라는 개념이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창작자가 자신의 작품이 어떻게 공개되고 활용될지 결정할 권리. 할아버지께서 이 원고를 세상에 내놓고 싶어 하셨는지, 아니면 그저 자신만의 기록으로 남기고 싶으셨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이 작품을 공개하는 것은 할아버지의 저작인격권을 침해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어느 날, 나는 할아버지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던 할어버지의 주치의를 우연히 만난 기억이 떠올랐다. 그분은 할아버지의 문학적 열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네 할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지. '내 글이 언젠가는 세상에 나와 누군가의 마음에 닿았으면 좋겠다'고."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저작권이 단순히 법적 권리 이상의 것임을 깨달았다. 그것은 창작자의 목소리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울려 퍼질 수 있도록 하는 다리였다. 할아버지의 원고는 단지 종이에 적힌 글자가 아니라, 그분의 영혼이 담긴 메시지였고,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저작권의 본질적 가치였다.
출판사를 찾아다니며 할아버지의 원고를 소개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여러 번의 거절 끝에 작은 독립출판사에서 관심을 보였지만,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원고의 일부를 현대적 감각에 맞게 수정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이것은 저작권의 또 다른 측면인 "동일성유지권"의 문제였다. 창작자의 의도와 작품의 본질적 가치를 지키는 것과 현대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접근성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부분이였다.
결국 나는 원고의 본질은 유지하되, 시대적 맥락을 설명하는 해설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할아버지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로 결정했다. 출판 계약서를 작성하면서 느꼈다. 저작권이란 단순히 경제적 이익의 문제가 아니라 창작자의 정신적 유산을 보존하고 존중하는 문화적 약속이라는 것을.
"바다로 가는 기차"가 출간된 후, 놀랍게도 많은 독자들이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공감했다. 70년 전 젊은 작가의 꿈이 뒤늦게 꽃을 피운 것이다. 한 독자는 편지를 보내왔다.
"이 책은 우리가 잊고 있던 시대의 목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당신의 할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때 나는 저작권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한것 같다. 단지 복제와 배포를 통제하는 권리가 아니라, 창작자의 목소리가 시간을 초월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는 문화적 약속이라고. 할아버지의 원고는 비록 오랫동안 서랍 속에 묻혀 있었지만, 저작권이라는 제도가 있었기에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세상과 만날 수 있었다.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며 창작물의 생산과 소비 방식은 급격히 변화했지만, 저작권의 본질적 가치는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창작자의 노력과 영감을 존중하고, 그들의 목소리가 다음 세대에게도 전해질 수 있도록 보장하는 사회적 약속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쉽게 콘텐츠를 소비하고 공유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누군가의 열정과 노력, 그리고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할아버지의 미발표 원고를 통해 나는 저작권이 단순한 법적 개념이 아니라, 창작의 가치를 인정하고 문화적 유산을 보존하는 우리의 지혜임을 느꼈다.
할아버지께서 남기신 원고 맨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언젠가 이 글을 읽는 이가 있다면, 그때는 나의 생각이 시간을 건너 당신에게 닿은 것이다."
저작권은 바로 시간을 초월한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소중한 권리이자, 우리 모두의 문화적 책임일 것이다. 할아버지의 원고를 통하여, 나는 저작권이 보호하는 것이 단순하게 글자나 이미지가 아니라, 인간의 창의성과 어쩌면 영원할지도 모르는 그 가치임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