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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온실 수리보고서를 읽고-6장

by 모도리

읽은 날 : 2025. 2월 28일

읽은 쪽 : 6장 큰물새우리(284~345쪽)

6장의 키워드 : 누구나 기억은 가지고 있다. 그게 맞든 맞지 않듯

- 6장에 대한 에필로그

조금씩 수수께끼가 풀린다. 그런데 그 수수께끼가 결국은 영두의 삶이다. 이제 그녀의 삶을 같이 찾아보고 돌아봐야 할 듯 싶다. 걸어온 인생을 보며 자신의 과오도 정리하고, 바로 잡고 진정 기억에서 추억으로 담을 수 있을리라.


- 기억에 남는 문장

301쪽 함양문을 지나 창덕궁으로 넘어왔고 금천 옆 회화나무까지 다다랐다.

307쪽 내가 집을 산 것도 아니고 동네로 이사 온 것도 아닌데 왜 그런 표현을 썼을까. 돌아옴. 귀환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지 않나.

320쪽 가장 중요한 사람이고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라 그렇겠지. 라고 나는 답했다.

326쪽 백실장은 유적 다 밟아놓을 일 있으냐고 신발이라도 바꿔 신으라고 다그쳤다.

327쪽 “여러분, 꽃삽이라고 하는 요건 아무나 잡는 게 아니에요. 저도 이거 잡을 때까지 현장에서 삽질만 한 오년 했거든요. 제 지시대로 잘 파시기만 하면 됩니다.”

340쪽 “그럼 뭐, 다들 욕먹을 각오는 하시고요. 과거를 끄집어 낸다는 거 되게 용기가 필요한 일이거든요.”

- 읽은 소감

회화나무는 어느 마을이나 어느 지역에도 쉽게 볼 수 있는 나무이다. 하지만 그 회화나무가 남아 있는 곳들은 아픔이 서린 곳이 많다. 오래살면 1000년을 사는 나무이니 수많은 것들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역사에서도 참 많이 등장한다. 요즘 새롭게 나온 오월의 회화나무에서 1980년의 회화나무가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다. 근무하는 학교 근처에도 회화나무가 있다. 그 앞에 동그랗게 앉아서 아이들이랑 담소를 하다보면 먼 훗날 아이들이 한참 큰 후에 이곳을 들릴 때 나무만은 그 자리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조가 그래서 행궁 앞에도 회화나무를 심었나 보다. 그 마음이 이제 아이들의 추억이 되고 있지만 말이다.

올해 학교를 옮겼다. 작년에 연구년이었기에 당연히 제자가 없었는데, 졸업시킨 아이들이 기왕 이렇게 된거 2년간 담임선생님으로 모시겠다고 하더니만 한달에 한번 꼭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2월 28일에 아이들에게 중2병 걸리지 말고 잘 지내라는 문자를 남겼다. 그렇게 아이들과 답장을 주고 받으며 두어시간을 보냈다. 아내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이랑 아직도 연락을 하냐며 핀잔을 준다. 이때 한 아이가 자기 동생 담임 맡아달라며 다시 돌아와 달라고 했다. 돌아옴. 귀환은 이럴 때 쓰는 말이어야 하는데 순신이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영두는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왠지 순신이는 항상 그 자리에서 영두가 오기만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당연히 돌아옴. 귀환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영두가 낙원하숙을 떠난 날도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석모도로 돌아갔으니 순신에게 돌아오는 거라고 생각했으리라. 그래서 순신의 말은 영두가 못다 푼 숙제를 풀었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았다.

내일 모레면 새로운 학교에서 새로운 아이들을 만난다.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외우면서 당일 날 아이들 이름 맞추기를 바로 할 수 있게 준비하는게 첫 번째 나의 첫날 미션이다. 가장 중요한 사람이기에 아이들도 나에게 잘 보이고 싶을테니 그때 아이의 이름을 불러주면 서로 정말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을 슬그머니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대학시절에 아르바이트겸 대학박물관에서 발굴단에서 2년을 활동했다. 2학년부터 4학년 초까지 대학 근처에서 고인돌, 선사시대 발굴을 했었는데 그 때 교수님이 한 3년은 해야 트라울가질 수 있으니 졸업하고 학예연구사를 해 보라고 한 적이 있었다. 내 성격상 진득히 앉아서 붓질을 하는 게 지루하지 않았고 세심하게 하나 하나 처리하는 게 재미있기도 했으니 말이다. 거기다 하루는 발굴조사 중 내가 땅 아래 있는지 모르고 그냥 가버려서 하루를 꼬박 고인돌 발굴지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내 발밑에 어쩌면 아주 먼 옛날 부족장의 유물과 시신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털썩 누워 하루를 바라보며 밤샘을 하는데도 하나도 무섭지도, 두럽지도 않았다. 그렇게 편안했던 게 처음일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학예연구사보다 교사가 되고 싶은 마음에 교사가 되었지만 아직도 트라울은 갖고 싶다. 당시 교수님을 가끔 만나면 “행복하냐? 그럼 됐다.” 하시지만 못내 아쉬워 하시는 하시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대학시절 유홍준교수님과 닮았다고 지도교수님이 답사갈 때 따라가 보라고 했을 때 해박한 지식과 동네 아저씨 같은 구수한 말투로 재미나게 답사지를 설명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아직도 아이들이랑 그래도 답사를 꾸준히 다니고 있으니 그걸로 만족해야 겠다.

어쩌다 보니 영두의 과거와 문자할머니의 옛 과거를 찾는 글을 읽으며 나를 돌아보고 나를 추억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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