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10
그날은 어둠이 내려앉으면서 동시에 비가 왔다. 살이 올랐던 구름은 투덜대며 집으로 돌아가고 하늘은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시간은 한 치의 오류도 없이 흐르고 밤과 낮은 규칙적으로 교대하며 계절이 바뀌는데, 나는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다. 나는 스무 살 때도 그렇게 느꼈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만 변해간다, 혹은 나아간다. 나는 나라는 존재의 살갗을 기준으로 해 외부와 내부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고 느꼈다. 그 시기에 내가 문학과 영화를 주제로 한 교양 수업을 듣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나 자신보다 일찍 변화의 필요성을 감지한 작은 세포가, 영향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교양 수업 선택에 관여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나는 예정된 수순에 따라 문학과 영화를 체험하며 외부와 내부의 균형을 맞추었다. 그렇게 외부의 힘에 대항할 힘을 키운 것이다. 나는 임관한 이후 이따금 영화는 보았지만, 소설은 거의 읽지 않았다. 대신 미래를 대비해 영어를 공부했고, 체력을 키우기 위해 달리기를 하거나 팔굽혀펴기와 철봉 운동을 했다. 월급을 받는 직업 군인으로서 최소한의 직업윤리가 아니겠나, 하고 생각해서 시작한 운동이었다. 나는 주에 대여섯 번씩 이른 아침에 운동하면서 삶의 리듬이 안정적으로 잡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전을 힘차게 보낼 수 있었고, 식욕이 좋아졌으며 잠에 들지 못하는 밤 같은 건 없었다. 퇴근 후에는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고 공원을 걸었다. 그리고 맥주를 마셨다. 그것만으로 삶은 충만했다. 우리는 종종 여행도 다녔다. 강원도의 깊은 산속에 있는 펜션을 찾아내 며칠씩 신선한 산소를 담뿍 마시며 쉬고 오기도 했고, 때로는 다카마쓰나 가고시마 등 여행객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일본 도시에 사나흘씩 갔다 오기도 했다. 무엇이 더 있어야 했을까? 더 좋은 집과 차? 근사한 지위? 삶은 언제나 균형과 리듬이 중요한 것이어서, 나는 오히려 다른 무엇이 내 삶에 불쑥 들어와 버리면 평온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퇴근 후 관사로 돌아와 이미 끈으로 묶어버린 책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추리소설은 본가에 남겨두었고, 이곳에 있는 책들은 대부분 수영과 결혼 후 임관하기 전까지 약 삼 년간 읽은 소설이었다.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악령》 마지막 권을 꺼냈다. 임관을 몇 달 앞두고서 고전문학과 작별 인사하는 기분으로 읽은 소설이었는데, 읽는 내내 놀라웠지만 특히 마지막 삼 권이 가장 흥미로웠었다. 나는 책을 식탁에 올려둔 뒤 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영이 있는 도시와 내가 밟고 있는 이 도시는 아마 팔천 킬로미터쯤 차이가 날 것이고, 그러므로 이곳의 일기(日氣)와 그곳의 일기는 상관이 없겠지만, 그럼에도 비가 오는 저녁은 나를 걱정스럽게 만들었다. 수영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마 근무 중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나는 냉장고에 맥주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더운물로 몸을 구석구석 깨끗이 씻은 뒤에 맥주를 한 캔 꺼내어 마셨다. 맛이 좋은 생맥주를 며칠 마시다 편의점 맥주를 마시면 편의점 맥주가 피상적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도저히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나는 창문을 열어두고 빗소리를 들으며 《악령》을 읽었다. 한 문단을 읽고 난 후에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아주 좋은 리듬이다. 비는 거세지지도, 약해지지도 않고 여전한 속도로 떨어져 땅에 부딪혔고, 이따금 바람이 불면 창문을 때렸다. 종종 타이어가 노면 위로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비가 오면 사람의 말소리는 줄어든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맥주를 한 캔 다 마시고서 창문 앞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심호흡했다. 달리기를 몇 년간 쉰 러너가 쉬지 않고 장거리를 달려낼 수는 없듯이, 독서를 오래 쉰 독서가 역시 쉬지 않고 소설을 읽을 수 없다. 특히 그 소설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인 경우는 더욱이 그렇다. 나는 산소를 충분히 빨아들여 머리를 맑게 했다. 물론 식탁 앞이나 창문 앞이나 산소 농도가 다를 리야 없겠지만, 그럼에도 창문 앞에 서면 확실히 공기가 낫다고 느껴진다. 내가 두 번째 맥주를 꺼내어 식탁 앞에 앉았을 때 현관문의 잠금장치가 띠디디, 하는 소리를 냈다.
아무도 찾아올 리 없는, 혼자 사는 집에 있는데 누군가 현관문을 열려고 한다면 물론 매우 놀랄 만한 일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온몸의 세포가 경직되고 털이 곤두설 정도로 끔찍이도 무서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 층수를 착각했을 수도 있는 일이다, 하고 생각하면서 다소 긴장한 채로 현관문을 보았다. 관사 내 잠금장치는 다 같은 제품을 붙여놓았으니까, 사 층에 사는 사람이 삼 층 현관문을 열려고 하는 경우쯤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어코 현관문은 열렸고 놀랍게도 그 앞에는 나의 아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영은 현관문을 열고 멈춰 선 채 놀란 나의 얼굴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는 물론 환영 같은 게 아니었다. 그녀는 실재했다.
“얼마나 놀랐어?”
수영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캥거루가 문을 열었대도 이보다는 놀라지 않았을 거야.”
“거짓말.”
그녀는 쿡쿡대며 웃었다.
“산신령이 금도끼를 준대도 이보다는 기쁘지 않았을 거야.”
“바보. 금도끼가 낫지.”
그녀는 배낭을 메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그저 잠시 들른 것뿐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병원에는 병가라도 낸 거야?”
“그랬다가는 들켜. 거기는 선수들만 있으니까.”
수영은 배낭을 내려놓고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씻으며 말했다.
“남편이 올 생각이 없는 것 같길래 바람이 났나 해서 몰래 왔더니 혼자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있네.”
나는 식탁에 놓인 책과 맥주를 보았다. 물론 그 이미지는 객관적으로 봐도 매우 고독해 보였다.
“내가 마실 맥주도 있을까? 없으면 사 오고.”
“아니야, 물론 충분히 있어.”
나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 씻은 후에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식탁 의자에 앉아 《악령》의 겉표지를 이리저리 뜯어보며 맥주를 양껏 마셨다.
“정말 얼마나 마시고 싶었는지, 몰라. 비행기에서는 화장실에 가는 게 번거로워서 참았거든.”
나는 그제야 그녀에게 도대체 이 먼 거리를 어떻게 말 한마디 없이 건너올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다.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진짜 대화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아내가 팔천 킬로미터를 날아온 데는 그 이유밖에 없을 것이었다. 긴 대화가 될 것이었다. 나는 참호전에 대비하는 병사의 마음으로 냉장고를 열었다. 든든하게 먹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다행스럽게 냉장고 안에는 어제저녁 사다 둔 식빵과 치즈, 그리고 토마토소스가 있었다.
“배고프지? 식빵에 치즈를 올려서 구울까?”
“좋아.”
나는 식빵 위에 치즈를 올려 에어프라이어에 넣어 구웠고, 토마토소스는 그릇에 따로 덜어 전자레인지에 넣고 덥혔다. 이렇게 먹는 빵 요리는 우리가 결혼한 이래로 자주 해 먹던 음식이었다. 요리라고 말하기는 민망할 정도로 간단하지만, 재료가 무척 저렴할 뿐 아니라 먹어 보면 의외로 굉장히 맛있다. 배가 몹시 고플 때는 웬만한 피자보다 맛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내가 빵을 굽는 동안 수영은 배낭에서 잠옷을 꺼내어 갈아입은 후 욕실에서 얼굴을 씻었다. 나는 다 구워진 빵을 에어프라이어에서 꺼내고 새로운 빵을 굽기 시작했다. 식빵은 노릇노릇했고, 치즈는 녹아서 윤기가 흘렀다. 나는 그 위에 토마토소스를 뿌리고, 새로이 구워진 빵을 덮었다. 수영은 배가 고팠는지 금방 돌아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빵을 먹기 시작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대화는 잠시 중지한 채 토마토치즈식빵을 맥주와 함께 맛있게 먹어 치웠다. 빵은 바삭바삭했고 치즈는 고소했으며 토마토소스는 달콤하고 상큼했다. 그러한 식감과 맛이 역시 잘 어우러졌다.
“두 달만이야, 우리.” 그녀가 말했다.
“보고 싶었어.”
“고마워. 나도 그래.”
나는 수영에게 인천에서 논산까지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국내선을 타고 청주로 가서 그다음에는 택시를 탔어.”
나는 “그랬구나”하고 답했다. 그녀는 무척이나 먼 거리를, 긴 시간과 큰 비용을 들여 달려온 것이었다. 오직 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일념으로. ‘우리는 부부니까’하고 그녀는 말했었다. 나는 그녀에게 언제 돌아가느냐고 물었다.
“모레 저녁 비행기로 돌아가. 그렇지만 내일 오후에 인천으로 갈 예정이야. 엄마와 하루쯤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아. 이번에 보지 않으면 앞으로 일 년쯤은 못 볼 테니까.”
나는 좋은 생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