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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호 Dec 25. 2021

결국 프락치는 왕이었나

배신을 화합의 이름으로 변명하지 말라.

 스코틀랜드 민족해방사에서 혁명이 좌절되는 결정적 요인은 지도자로 포장된  왕이라는 합법적 대표자들의 배신이었다.

 민중의 자주를 향한 혁명운동은 화합을 내세운 왕의 배신으로 인해 좌절되고 만다. 이것은 인정하기 참으로 불쾌한 역사의 검증된 합법칙성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무조건적 충으로 포장된 대표자 왕은 결정적 시기에서 번번이 백성을 배신하고 말았다. 선조가 그러했으며 고종이 그러했다. 동학혁명과 고종의 배신 역사는 일제강점기를 거쳐서 현재에 이르도록 상처로 남겨졌다.


 문제는 왕에 대한 충성의 관점이다.

 주자는 성리학을 내세워 군자의 도리로 충을 국가의 이념으로 만들었다. 대표자인 왕을 절대시화해 나라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여전히 우리는 주자의 이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표자를 애써 절대적 존재로 포장하고 그에 의지해 역사를 전진시켜 나가려 한다.


 이제 최소한 대표자를 신성시하거나 절대시 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분명한 함정이다. 대표자는 신에 버금가는 절대적 존재도 신성한 분도 아니다. 그저 대표로서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들이 벌이는 화합을 내세운 말도 안 되는 월권행위를 용납할 수 없다. 그들의 월권도 잘못된 백성들의 왕에 대한 관점이 만들어준 것이다.


선거는 대표자를 선출하는 것이지 신성한 왕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다.

늘 그들이 내세우는 화합의 논리는 역사를 거꾸로 되돌려 세우고 만다.

 왜 가진 자가 아닌 못 가진 자들만이 이해하고 용서해야 하는가?

 이것이 결국은 가진 자를 위한 것이 아니던가?

결국 프락치는 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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