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적동 봄을 그리다(2)
이제는 보리순도 농촌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농작물에 해당된다. 보리를 재배하는 농가를 찾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보리는 쌀에 비해 저평가되었던 곡물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보리에 대한 기억을 소환해 보면 먼저 이맘때 먹었던 보리순 된장국이 떠오른다. 어릴 적 어머니는 보리순을 베어와 곰바부리와 함께 된장국을 자주 끓여주셨는데 그 구수한 맛은 잊을 수 없다. 보리순과 곰밤부리를 넣은 된장국에 동태나 아귀를 가끔 넣고 끓여주셨는데 그날은 특별하게 입이 호강하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동태국을 끓이실 때 꼭 내장과 함께 끓여주셨는데 그 맛은 가히 일품이었다. 전라도 말로 개미가 넘치는 맛이었다. 전라도 사람들은 맛이 참 개미 있다는 표현을 잘 쓰는데 정말 맛있는 독특한 맛을 표현할 때 개미가 있다고 한다. 지금은 동태를 내장과 함께 넣고 탕이나 국을 끓이는 집을 찾기가 힘들다. 몇 해 전 몽탄 식당에서 내장과 함께 끓인 동태국을 먹으면서 어머님이 몹시도 그리워졌다. 감사했다. 보리순과 잘 어울리는 식재료가 겨울철 아귀다. 동태와 마찬가지로 아귀도 내장과 함께 탕이나 국을 끓이면 그 맛이 너무도 훌륭하다. 아귀탕은 뼈가 흐물흐물해질 정도로 푹 오랫동안 끓이는 게 중요하다. 아귀와 보리순이 된장을 통해 어울리는 깊은 맛은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이는 맛있는 맛이다.
보리에 대한 두 번째 기억은 여름 된장이 부족해갈 무렵 어머니는 보리를 볶아 맷돌에 거칠게 타서(갈아) 된장에 섞으셨다. 보리는 부족한 된장의 양을 채울 목적이기도 했지만 된장의 구수함을 더했다. 콩된장의 맛이 있다면 보리를 섞은 된장의 특별한 다른 맛이 있다. 지금은 그 어디서도 보리를 섞은 된장의 맛을 볼 수 없다. 아름다운 우리 전통의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다.
보리에 대한 세 번째 기억은 6월 보리를 탈곡하던 날 벌에 쏘인 기억이다. 어릴 적 보리를 베어와 마당에서 한꺼번에 쌓아두고 날을 잡아 탈곡을 했는데 이날은 온 가족이 동원되었다. 나는 그날 부모님 곁에서 잔신부름을 했는데 옆집 아재가 그날 벌통에서 분봉한 벌을 나무에서 벌집으로 다시 옮기는 작업을 하시고 계셨다. 벌집을 나온 요란한 분봉한 벌모습이 신기해 나무밑에서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아재의 실수로 그만 벌뭉치가 쳐다보고 있는 나에게 한꺼본에 쏟아지고 말았다. 얼마나 많은 벌을 쏟였는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벌을 쏘였고 나는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옷을 입지 못하고 살아야 했다. 어머니 표현을 빌자면 "용하게 그래도 죽지는 않았시야!"였다. 그 이후로 벌을 비롯한 뱀이나 지네 등의 독을 잘 타지 않는다. 결혼후 독사에 물렸었는데 의사가 놀랄 정도로 나는 얼마 붓지 않았고 통증도 별로 느낄 수 없었다. 지네에 물려도 조금 가렵고 만다. 아마도 수백 방의 벌침이 내 몸에 특별한 항생력을 키웠던 것 같다.
보리에 대한 네 번째 기억은 보리를 재배해 돼지먹이로 실험했던 기억이다. 돼지는 보리를 아주 좋아하는데 문제는 보리를 먹이게 되면 만들어지는 돼지의 엄청난 지방이었다. 돼지에게 보리는 물론이며 보리겨를 먹였는데 돼지고기의 지방이 엄청나게 늘어나 실험의 실패는 물론이며 엄청난 경제적 피해를 보아야 했다. 보리순을 재배해 돼지에게 먹이는 실험도 진행했는데 그 또한 무모한 실험으로 끝나고 말았다. 보리순을 먹이는 과정에서 많은 돼지들이 희생되었다. '돼지는 잡식동물이니 무엇이나 잘 먹는다'는 그릇된 편견이 가져온 정당한 실패였다. 잡식동물은 절대 아무거나 잘먹지는 않는다. 좋아하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할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돌아보니 보리는 나와 많은 인연이 있었다. 2월 중순 황량한 들판에 청보리밭은 사막에 오아시스와 같다. 우리가 보리를 천대함으로 인해 청보리밭의 아름다운 풍경도 이제는 축제장에나 가서 볼 수 있는 귀물이 되고 말았다.
지난해 가을 정원에 앉은뱅이 밀을 보리 대신 심었다. 푸른 것을 볼 수 없는 겨울과 초봄을 위해서였다. 세상은 변화하는게 본질이지만 선택할수 있다면 들고 남에 가치와 의미 정도는 계산할수 있어야 한다. 보리는 여전히 매력적인 작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