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적동 봄을 그리다(13)
나의 인내력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느낄 때쯤 우적동에 꽃피는 봄날이 찾아왔다.
매화가 드디어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작년과 비교해 20여 일이 늦어졌다. 나는 그 이유를 알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어버린것에 몹시 당혹해하는 중이다. 그러나 당혹함도 부질없다.
매화를 집 앞 언덕베기에 심은 것은 10여 년 전이다. 꽃도 보고 열매도 얻을 목적으로 10 여주 매화나무를 심었다. 꽃을 피우는 시기도 각기 다르고 열매의 크기와 맛도 차이가 난다.
매년 매실은 우리 가족이 쓰고 남을 만큼 많은 양을 수확한다. 매화는 나무가 나이를 드는 만큼 점점 멋스러워지고 있다. 꽃이 피는 나무들은 나이가 계급장이다. 오래될수록 품격이 높아진다. 그 품격에 늘 경외감이 든다.
우리 집 정원에 심어진 벚꽃이 그러하며 사과나무가 그러하고 호랑가시 은목서가 해가 갈수록 그 나잇값을 품격으로 갖추어 나가고 있다. 내가 나무를 존경하는 이유다. 내 늙음이 나무처럼 고귀한 품격으로 다가오길 바라고 노력한다.
나는 나의 늙음을 나무들로부터 위로받으며 그렇게 함께 늙어가고 있다. 나에게 정해진 삶이라는 운명은 알 수 없다. 그저 다가올 죽음을 오늘의 늙음을 통해 편안하게 받아들여가는 중이다. 오늘처럼 꽃을 피우는 나무들과 교감하면서.
우적동에는 봄이 왔지만 인간세상은 혹독한 겨울이 이어지는 중이다. 지난 오십여년 늘 세상의 봄을 쫓아왔건만 내가 쫓은 것이 봄이었는지 겨울이었는지 이제는 헷갈린다.
세상은 단정 지을 수 없으며 나 또한 단정할 것이 하나도 없다. 세상은 스스로 변화할 뿐 내가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지난한 투쟁의 깨달음이다.
나는 게으름뱅이 봄날에 다시 사랑을 찾는다. 나의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있는 그대로를 지지하고 인정하는 사랑이다. 그렇기 위해 나는 내 안의 모든 욕망과 직식이라 포장해 놓은 내가 안다는 것들을 버리는 중이다. 일체의 욕망을 버리고 그저 덤덤하게 세상을 관찰하며 운명을 맞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