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적동 봄을 그리다(30)
20대 후반과 30대를 관통했던 농민회를 접고 나니 빚은 3억대에 이르렀고 농민운동의 모든 실패에 따른 정치적 책임이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지난 십여 년 동안 그 빚을 해결했으며 무거운 멍에로 짓누르던 농민운동의 실패에 대한 책임에서 한결 자유로워졌다.
그러는 동안 우울증과 심각한 불면증이 뒤따랐고 빚을 갚느라 셀 수 없이 많은 돈벌이 시도를 해야 했다.
사람들은 그런 나의 속은 알려하지 않고 '한 가지 일을 제대로 못한다는 둥' '끝이 없다는 둥' 거의 막말을 해댔다.
나는 고단했던 그 시절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한해 최소 3천만 원의 빚을 갚았다. 아내의 소득으로 살림을 유지했고 내가 버는 모든 돈은 빚과 이자를 갚는데 써야 했다.
당시 나는 생각이 없었던 나의 농업을 부정하고 생각을 담고자 돼지사육을 시작했고 우리들에게 가장 소중한 두 딸을 키우는데 집중했다.
자급자족적 농업을 몸소 실천해 가며 상품이 아닌 먹을거리 문제를 중심으로 새로운 축산업을 실험해 나갔다. 거기서 나오는 코딱지만 한 소득으로 근근이 연명해 갔다. 새로운 시도는 수도 없는 시행착오를 불러왔고 그로 인해 정신적 고통 또한 매우 심각한 단계였다. 쉽사리 실험은 성공하지 못하며 반복적 시행착오가 뒤따랐다. 말 그대로 견디기 위한 나의 사투가 아주 오래도록 길게 이어졌다.
실험은 완벽하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돼지고기에 나의 노고의 흔적이 남겨졌고 소비자들이 그것을 조금씩 인정해 주며 살림살이도 조금씩 아주 느리게 나아졌다.
그렇게 견뎌내면서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것 같았던 그 밑 빠진 독도 차고 넘치는 날이 왔다.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 시절 세상에 대한 연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십 년 동안 신문에 칼럼을 썼고 아이들을 위해 마을교육공동체를 만들었다. 30대의 큰 좌절 뒤에 이어진 40대에 큰 성공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더는 후퇴하지는 않았다. 그것으로 다시금 세상을 바꾸어보겠다는 의지도 다시금 되살아났다. 최소한 내가 사회에 쓸모 있는 존재로 남겨지길 원했다.
돼지 사육에서 첨가하여 소를 방목사육하는 꿈을 이루었고 신문사에 취직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결혼 후 20여 년만 처음으로 아주 짧은 인생의 안정기가 찾아왔다. 삶의 안정감이 생겼고 가족들은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