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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호 Nov 01. 2021

방치와 간섭의 경계

심심해서 그랬어

아이들과 살면서 부모가 어디까지 간섭하고 통제하는 것이 맞는지  늘 고민된다.

 지나치게 개입하고 간섭하면 아이가 스스로 결정하는 힘이 사라지고 부모에 대한 의존성이 커진다. 통제할수록 의존성은 비례하여 자란다.


 간섭과 통제의 반대적 개념은 방치다. 아이의 행동을 방치하면 우선은 사고가 많아지게 된다. 대신 스스로 사고하고 결정하는 힘은 커진다. 아이는 이런저런 사고를 경험하면서 성장한다.  도덕적 범주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대형사고도 발생 가능성이 있다. 부모는 완전한 방치 보다는 적절하게 개입하고 통제하는 것이  마땅하다.


 통제가 지나치면 자주권과 창의력이 떨어지고 방치가 지나치면 문제행동을 일으킨다. 통제로 인해 발생하는 큰 범죄들을 수없이 볼 수 있다. 부모는 늘 통제와 방치의 경계에서 고민하게 된다.


 통제와 방치의 경계는 심심함이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오일남은 '심심해서 그랬다'라고 말한다. 아이들이 부모가 없을 때 온갖 재앙을 쳐놓고는 '심심해서 그랬어'라고 말한다.

  일상에 만족하지 못하는 심심함은 모든 사건사고의 출발점이다. 적당히 심심해야 새로운 궁리를 하게 된다. 새로운 궁리가 사회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창의력이 된다.


 요즘 한류는 세계에서 대유행 중이다. 한국은 문화예술의 새로운 강자로 급부상 중이다. 여기서 재미난 대목은 문화예술 분야에서 공교육의 작용이 거의 미비하다는 점이다. 한국의 공교육은 교육을 가르치고 외우는 암기로 보기에 아이들이 심심할 틈을 주지 않는다. 대신 공교육 밖에서는 심심함을 활용해 창의력을 키우고 있다.


 한류와 반대로 한국의 기득권을 장악한 법조인들은 온갖 사회적 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다. 대장동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이들 대부분은 대를 이어 기득권을 유지했고 그 뒷면에는 부모의 지나친 간섭과 통제가 있었다.


 한국의 교육은 여전히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헤매고 있다. 그것은 방치와 간섭의 경계인 심심함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와 문화는 방치와 간섭의 경계에 서있다. 정치는 지나친 개입과 통제를, 문화는 방치에 가깝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 또한 그 경계가 어딘지? 솔직히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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