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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호 Oct 29. 2021

군산동, 류다리 기행

무안기행 여섯번째 이야기

이글은 2021년 6월 무안신안뉴스에 게재된 글입니다.


 

 삼향면 유교리 냇가를 따라 한참 오르다 맨 끝자락 군산동 마을에 이르렀다. 마을洞자가 붙은 무안군 소재 승달산 인근의 마을마다 숨겨진 역사가 존재했었다. 우적동, 수월동 그리고 군산동, 여행에 있어서 역사를 찾아내고 이해하면 남다른 애정이 만들어진다. 현재는 오롯이 현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를 타고 과거를 통해 현재에 이르고 또 미래로 나아간다. 인간이 살아온 모든 땅에는 역사가 존재한다.

무안군 삼향면 유교리 군상동

 

 군산동에서 만난 역사는 목포시 옛 상수도 3수원지와 4수원지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목포를 근대적으로 강제개항하면서 그들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도시를 확장하기 위하여 근대 상수원지를 조성한다. 군산동에 존재하는 3수원지는 1915년에 준공식을 었으며 이후 4수원지 건설과 함께 몽탄면 달산리 5수원지를 건설한다. 수원지 조성의 역사 속에 일본이 목포를 어떻게 대했는지 잘 나타나 있다. 호남의 젖줄 영산강과 나주평야 및 바다의 어족자원들 뿐만 아니라 조선을 수탈하기 위해 만든 전진기지가 목포항이었다. 개항과 철도 건설이 이어졌고 수많은 일본인들이 몰려들었다.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는 물이 부족한 목포에서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산동에 근대적 상수원 시설을 조성했다.  

목포시 제3수원지

 

 3수원지로 들어가는 초입에 상수원 철재 송수 관로가 도로에 드러나 있다. 철재 송수 관로를 지나 낯익은 거대한 나무들이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정확한 나이를 예측할 수는 없었지만 족히 수백 년은 넘어 보이는 비자나무 숲이었다. 무안에서 이렇게 오래되고 웅장한 비자군락지는 처음이었다. 몹시도 설렜다. 십여 그루의 비자림 주변으로 백여 년 전 일본인들이 식재했을 삼나무와 편백나무도 간간히 보인다. 군산동 비자림은 군산동의 역사에서 3수원지 이전의 역사를 말한다. 그러나 기록도 구전도 없기에 비자림의 역사를 밝힐 수는 없었다. 안타까웠다. 또 두 그루의 비자나무가 훼손되어 방치되고 있었다.  목포시가 민간에 이곳을 매각하면서 숲은 방치되고 있었다. 다시금 국가의 책무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자림을 지나자 오래된 단풍나무 숲이 나왔다. 그늘이 시원하고 상쾌한 청단풍 숲이었다. 승달산에 자생하는 종과는 달랐다. 일본인들이 이곳에 3상수원지를 조성하면서 상수원지 댐 아래 터에 조성한 단풍나무 숲으로 세월을 타고 독특하고 매력적인 숲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초대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1915년 3월 3상수원 준공식에 왔고 기념식수비를 남겼다고 한다. 기념식수비는 유교리 마을에 위치한 복지시설인 애증원 계단으로 이용되다 지금은 목포대 최성환 교수에 의해 목포근대문화역사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목포사람들이 왜 기념식수비를 왜 그곳으로 가져갔는지? 이해는 안가지만 그 식수비가 3수원지에 일본인이 조성한 단풍나무 숲임을 입증하고 있다. 단풍나무 숲은 가을에 찾으면 아주 매력적일 것 같다. 군산동에서 만난 아주 오래된 비자림과 단풍나무 숲! 가을을 기약했다.  

 단풍나무 숲을 지나 댐 계단을 올라 수원지에 도착했다. 수원지는 아담했다. 수원지 배후를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다. 수원지 앞으로 제일 높은 봉이 국사봉이라고 한다. 수원지에 세워진 취수탑은 백여 년의 역사를 지나 건재했다. 콘크리트 구조물에 철재다리로 만들어졌는데 조기석 회장님은 철재가 미국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알려주셨다. 취수탑으로 가는 철재다리는 사진을 찍기에 더없이 좋은 천연 포토존이었다. 포토존에서 조회장님과 기념사진을 남기고 다시 발길을 돌려 정수 송수시설로 갔다. 조그만 야외 수영장처럼 생긴 정수시설과 조그만 송수시설인 일본식 근대건물 송수관리실이 있었다. 이곳이 개인들에게 매각되고 모든 것은 잠들어 방치되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4수원지는 1930년에 세워졌다. 지금은 매각에 의해 개인소유주(군산동 마을에 위치한 회사 호일)에 의해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조기석회장님이 지난해 2020년 다녀간 뒤 블러그에 남긴 기록과 사진으로 관람은 대신해야 했다. 4수원지에서 특이할 점은 돔형식의 정수시설이었다. 지금은 철거된 조선총독부 건부의 중앙 돔을 연상케 하였다. 일제가 목포를 어떻게 대했는지 건물이 담고 있었다.  

 

 다시 군산동 냇가를 따라 내려가 유교리에 도착했다.  

 이곳의 본래 지명은 柳다리다. 버들류柳와 돌다리를 합해 류다리다. 돌다리 냇가 옆 오래된 버드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일본인 면서기가 유교리로 만든 것이다. 학다리가 학교가 되고 삽다리가 삽교가 되는 식이다. 일본 잔재를 청산했다고 하는데 가장 중요한 행정구역상 지명은 일본인 면서기들이 생각나는 대로 남긴 그대로다. 참으로 부끄럽고 치욕스럽다. 역사와 문화가 담긴 우리 마을들의 지명을 버리고 일본인 면서기들이 생각나는 대로 기록한 치욕의 행정구역 마을 명을 백년 넘게 써오고 있다. 나라는 왜 존재하는 것일까?  

 류다리 옆에서 쉬고 계시던 한 무리의 마을 아주머니들로부터 류다리의 역사를 배웠다. 그리고 그곳에 연대를 추정하기 어려운 오래된 돌다리가 있음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옆으로 침계정이라 불리는 오래된 정자가 있는데 이곳에서 음력 이월 초하룻날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마을당산제를 먼 옛날부터 지내오고 있다고 하셨다. 돌다리와 당산제! 류다리는 좋은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이야기를 품은 마을이다. 아주머니들은 마을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행정의 지원을 간절히 바라셨다.

류다리


 

 류다리 옆으로 웅장한 한옥 고택이 보인다.  안내 표지판에는 유교리 고택이라 적혀 있다. 1912년 친일지주 나상만이 지은 고택이라 적혀있다. 총독 데라우치가 1915년에 3상수원지 준공식에 왔으니 이곳 류다리와 나상만 고택 또한 지났을 것이다. 버선발로 데라우치를 맞이했을 나상만의 얼굴이 스친다.  

 현재 광목간 도로가 열리기전 이곳은 무안에서 목포로 가는 국도1호선이었다. 류다리는 과거 교통 중심지였다. 그리고 서해바닷길을 따라 이곳 근처까지 배들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류다리는 육로 수로 모두를 아우르는 교통과 문류의 중심지였다. 나상만은 육로와 수로를 통해 부를 축적했을 것이고 그것을 과시했을 것이다.  

 유교리 고택을 둘러보면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나상만이 집 앞에 지은 일본식을 가미한 창고였다. 너무도 어울리지 않아보였다. 집만 보아도 나상만이라는 사람이 어떤 성품의 사람인지 가늠이 되었다. 아주 욕심이 많고 뽐내기를 좋아했을 것이다. 자신의 권력과 치세를 자랑하기 위해 집 문전에 거대한 일본식 창고를 지었을 것이다. 유교리 고택은 한옥에 일본식 건축양식이 가미된 일제강점기의 근대한옥 건물로써의 가치는 있지만 둘러보는 내내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이것이 문화재로 된 것은 편하지 않을 마음을 염두로 두었을 것이라 위안했다.  

류다리 나상만고택



 

 류다리를 지나 돌아오는 길에 초의선사 탄생지에 들렸다. 초의선사 탄생지 뒤로는 군산봉수대가 있다. 군산봉수대 아래로 궁궐 같은 초의선사 탄생 다도 순례지가 조성되어 있다. 코로나로 인적이 드물었다. 왜 다도순례지가 차 산업과 연계되지 못할까? 그리고 관광과 역사와 문화의 관계와 해명에 대해 고민하며 여행을 마쳤다.   

 

자문 조기석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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