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돼지를 키우게 되었는가?
흙돼지 이야기(6)
우리 마을 이름인 우적동은 승달산과 법천사,목우암의 역사에서 등장하는 소와 관련되어 있다. 소우에 자치적 그대로 해석하면 소의 발자취 마을이다.
법천사를 창건하신 정명스님의 꿈에 법천사에서 큰 소가 일어나 걸어 나가는데 첫 발자국을 디딘 마을이 우적동이다.
그런 지명 덕분인지 우적동은 소가 잘되었던 마을이다. 특히 아버지는 소로 성공하셨고 80년대 후반에 백여두의 한우를 키우신 큰 목장주이셨다. 어릴때부터 소는 늘 우리 가족과 떼어놓을 수 없는 가축이었다.
80년대 초 쟁기질하던 누렁 황소에서 80년대 전경환에 의해 호주에서 수입된 야생 사로레와 1차 소파동을 고스란히 아버지를 통해서 간접 경험했다.
그리고 98년 집으로 돌아와 소를 키웠고 2008년까지 한우를 키웠다. 아버지를 통한 간접경험 직접 경험을 합하면 30여 년 소 사육의 경험을 지니게 되었다.
소 사육을 접고 흙돼지를 키우게 된 배경은 배합사료의 본질을 이해하면서 부터다.
98년까지도 현재 마블링 중심의 한우 등급제가 현장에서는 완벽하게 정착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이후 정부 주도하에 숫소의 거세와 등급제가 본격화되면서 등급제 시행 전보다 소 사육기간이 대폭 늘어나고 사료비가 폭증하게 된다.
등급제로 천만 원이 호가하는 비싼 소가 등장한 반면 사료비가 증가하고 사육기간이 늘어나 이것이 농가에게 득이 되는지? 아니면 사료 장사에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소비자에게 도움이 되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면서 등급제가 사육농가나 소비자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점점 등급제에 맞추어진 한우 사육에 흥미를 잃어가던 어느 날 우연히 발견된 배합사료 안에서 나온 닭뼈는 큰 충격이었고 현대 축산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되었다.
또한 농민운동가로서 먹거리에 자기 생각이 없었음이 몹시도 부끄러웠다.
닭뼈 사건을 통해 지나온 나의 삶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반대만 외쳐왔던 농민운동의 허와 실도 돌아보게 되었다.
최소한 내가 생산하는 것들이 국민에게 안전해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래도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배운 것이 축산업이기에 처음에는 한우를 배합사료 없이 무작정 키웠다. 풀사료로 키웠는데 전략도 전술도 부재했다. 특히 몸무게가 무거운 소를 별도의 판매체계를 세우지 못하고서는 소는 어렵다고 판단해 싸게 처분하고 흑돼지를 또 무작정 키우기 시작했다. 소에 비해 체구가 작으니 판매가 쉽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잡식동물이니 배합사료가 없어도 잘 크겠지라는 기대만으로 무작정 돼지를 키웠다. 그러면서 노력하면 한 5년 정도면 자리잡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를 걸었다.
무작정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험난한 시련을 안겨주었다. 5년은 무작정의 기대였고 강산이 바뀐다는 십 년이 걸렸다. 지금 돌아보면 수많은 상처와 함께 뼈아픈 교훈을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