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난, 구름의 남쪽

by 장선윤

몇 번의 배낭여행 후, '어디든여행병'을 심각하게 앓던 어느 날, 어느 카페에서 중국 윈난성(雲南省)의 쿤밍 왕복 항공권을 단돈 170,000원에 공동구매를 하고 있는 것을 우연히 봤다. 사기를 당해도 170,000원 아니냐고 합리화를 하면서 과감하게 입금을 했고, 다행히 티켓 관련 안내를 메일로 받았다. 출발일에 짐을 꾸려 공항으로 나가면서도 긴가민가 했는데, 약속한 장소에서 누군가 티켓을 나눠주고 있었다. 나처럼 '날려도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간단하게 짐을 꾸려 온 사람들이 대략 20여 명 정도 되었고, 그 중 티켓값을 날릴 각오가 제대로 되어 있었으므로 계획이 미비했던 9명이, 그나마 각자 조금씩 갖고 있던 계획을 서로 공유하기 위해 얼결에 동행이 되었다.

전교조 모임에서 온 아저씨 4명, 중국 여행이 72번째라는 70대 부부 그리고 나처럼 혼자 온 여자가 셋. 이렇게 9명은 정식으로 팀을 이룬 것도 아니면서 또 각자 독립적이지도 않은, 이합집산이 유연한 형태로 함께 보름 정도를 다녔다.

쿤밍(昆明)에서 따리(大理)로 가는 날, 아침에 길거리에서 사 먹은 국수가 탈이 나, 기차 안에서 구토와 설사로 밤새 골골거리고 고생을 하다 새벽녁 살풋 잠이 들었다 깨자, 할머니께서 신라면에 뜨거운 물을 담아, 아가씨 덕분에 할아버지 한 번은 깡소주 드시게 생겼다며, 말씀은 퉁명스러우셨으되 너무나 따뜻한 마음을 전하셨다. 염치불구하고 그 뜨겁고 매콤한 것을 들이켜며 두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공항에서 처음 만났을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책가방만한 배낭을 각각 메고 계셨고 거기에 할아버지는골프 보스턴백을 손에 들고 계셨는데, 배낭에는 각자의 옷가지 등 여행에 필요한 짐들이 들어있고, 보스턴백에는 팩소주와 약간의 안주거리로 채워져 있었고 그중 일부가 컵라면이었던 모양이었다. 할아버지가 중국을 너무 좋아하셔서 할머니는 어쩔 수 없이 백날 중국만 다니고 있다고 푸념을 하셨지만, 두 분의 여행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할아버지 뿐만 아니라 할머니의 내공도 보통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물갈이를 하는 것을 보시고, 백약보다 신라면 국물 한 모금이 직빵이라는 처방을 내린 것도 할머니셨으니 말이다.

따리(大理)에서 리장(丽江)으로 가는 장거리 로컬 버스 안에서는 가도가도 끝이 없자, 9명이 도착시간 맞추기기 내기를 하여 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후토샤(虎跳峽-호도협)에서는 한문 선생님의 구성진 판소리 가락을 들으며 트레킹을 하였고, 또 밤새 우리 교육이 나아갈 바에 관한 열띤 토론을 하기도 했다. 따리에서는 함께 자전거를 타고 뻥뚫린 길을 달리며 해방감에 젖기도 했고, 리장에서는 길을 잃은 수학 선생님의 행방을 놓고 실종인지, 도주인지, 납치인지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여러 가능성에 대해 추리하며 밤을 지새우기도 하는 등 다사다난하게 여행이 끝났다.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할머니께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께서 보고 싶어하시니 밥을 먹자는 거였다. 나는 선물로 내 카메라에 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진을 인화해서 가져다 드렸다. 할아버지는 늘 할머니와 둘이 여행을 다니시는 데에 익숙했는데, 함께 사진도 찍고, 이동 시간 동안 서로 말동무가 되었던 것 등등의 기억이 좋아서 나를 꼭 다시 보고 싶었다고 말씀하셨다. 물갈이 때문에 기차에서 밤새 토악질을 했을 때는 얼굴이 허옇더니 신라면 한 그릇에 다시 발그레 하게 얼굴이 돌아왔을 때 얼마나 안심을 했는지 모른다는 말씀도 기차에서는 혹시나 설레발일까하는 마음에 아꼈다가 그제서야 입밖으로 꺼내셨다. 헤어질 때는 용돈을 담은 봉투를 가방에서 써내 내 가방에 넣어 주시며, 딸에게 이 정도는 줄 수 있는 거 아니냐며 안 받으면 화를 내시겠다는 엄포를 놓기도 하셨다.

지금은 두 분의 연락처도 없고, 두 분의 얼굴 모습조차 희미하다. 그리고 그 이후 나는 아시아와 북미 그리고 유럽의 많은 나라와 도시를 여행해 그 여행에 대한 기억은 더욱 희석되어 버렸다. 그러나 내가 그 여행에 대해 분명하게 기억하는 하나는 그때 나는 윈난이라는 지역을 다녀왔다기보다는 따뜻한 사람들의 품속으로 다녀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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