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by 장선윤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기회가 없는 삶을 대체로 살아 왔지만, 몇몇 여행에서는 본의 아니게 죽음이 화두가 되기도 한다.


인도 바라나시 만큼 나와 무관한 무수한 죽음을 가까이서 목격할 수 있는 여행지도 없을 것이다. 골목골목, 똥을 피하다 보면 길을 잃고, 길을 찾다보면 똥 밟을 수밖에 없는 숙명의 도시 바라나시, 그리고 그 도시의 골목들. 그것은 바라나시를 가장 쉽게 설명하는 일종의 상징이다. 그 좁은 골목을 통해 시체 운구가 이루어진다.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가에서 화장(火葬)되어 자신의 재를 뿌리는 것이 많은 힌두교도의 꿈이라던가. 그 꿈을 이루려는 자들은 죽을 때가 되면 가진 재산을 정리해 좁디좁은 골목에 허름한 방을 얻어, 그곳에서 죽을 날을 기다린다. 그러다 죽으면 그 시신은 갠지스 강가의 가트 어딘가에 있는 화장터로 옮겨진다. 들것에 시신이 실리고, 그 위에 꽃이 뿌려지고, 주황색 천으로 엉성하게 묶인 후 몇 명의 장정들에 의해 옮겨진다. 산 사람들만으로도 충분히 붐비는 좁은 골목길에 죽은 이의 흔적이 무단으로 침입해 오는, 이런 낯선 풍경에 처음엔 무척 당황했지만 며칠 머물다보니 여기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라는 것에, 그리고 나와 무관한 이의 죽음에도 무뎌졌다.

가트의 화장터에서는 시신을 태우고 재를 강에 뿌리는 전 과정을 누구나 볼 수 있다. 일련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삶과 죽음 그리고 그 경계 등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이렇게이렇게 달라지리하며 다짐같은 것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보다 어떤 시신은 완전히 가루가 되어서, 또 어떤 시신은 손가락 발가락이 타다만 채로 강에 뿌려지기도 하는데, 그 차이는 시신의 생전 재력과 관련이 있다. 재력이 충분한 시신은 생전에 충분히 사 둔 땔감을 우물정자 모양으로 높이 쌓는다. 그리고 그 가운데 시신을 얹고 또다시 그 위에 땔감을 우물정자 모양으로 쌓는다. 그리고 그 가운데 아래에 불쏘시개로 불을 피우면 아래쪽 땔감부터 차례로 타올라 시신을 태우고 위쪽 땔감들이 모두 타들어가며 시신을 완전히 재로 만든다. 그러나 가난한 이의 시신은 땔감을 충분히 사용하지 못하므로 육신을 완전히 재로 만들지 못하고 손가락, 발가락 같은 일부분은 생전의 형체를 유지한 채 갠지스강에 뿌려진다. 전날밤 갠지스강에서 배를 타고 꽃불을 띄우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엄지손가락이 떠다니는 것을 본 것도 같고 안 본 것도 같았는데, 그때의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몽골에서는 짚차를 빌려, 드넓은 초원을 달리다 쉬다 놀다 자다를 반복하는 여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뼈만 남은 동물의 사체를 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야크와 같이 커다란 흔적은 물론 고양이인지 마못인지 조그마한 형체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이런 동물의 사체들은 야생에서 그대로 맞이한 죽음의 흔적일 수 있지만, 사람은 다소 인위적인 과정을 거친다.

몽골에서 누군가 죽으면 가까운 친구 몇 명이서 말에 달구지를 달고, 달구지에 술을 잔뜩 싣는다. 그리고 친구들이 타고, 시신을 달구지의 가장 바깥쪽에 싣는다. 말을 때려 달리게 하고, 그때부터 친구들은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신다. 내가 술인지, 술이 나인지 모를 만큼 취해 정신이 몽롱해졌다가 잠이 든다. 그렇게 취한 채 잠들어 어딘지 모를 곳으로 한참을 달려간 곳에서 술이 깨고 잠이 깨어 정신을 차려보면 시신은 없다. 덜컹이며 달리던 그 어딘가에서 시신은 떨어졌고, 그곳에서 서서히 풍장(風葬)이 진행된다. 그리고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 동안 바람에 불리어 우리가 어쩌다 마주친 모습이 된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다,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돌아가는 방법이리라. 그리하여 죽은 이가 어디에서 잠들었는지는 가족은 물론 마지막을 함께한 친구들조차도 알 수가 없다. 이런 이유로 징기스칸이 잠든 곳을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티벳에서는 전통적으로 조장(鳥葬)이 이루어진다.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사원의 가장 높은 곳에 올려 둔다. 그러면 새들이 와서 먹을 수 있는 부분들을 먹는다. 처음에는 힘이 센 새들이, 나중에는 작은 새들이 와서 알뜰히 발라 먹는다. 그리하여 남을 것만 남은 상태가 되면 사원의 승려가 그것들을 거두어 땅에 묻는다.

내가 티벳에 갔을 때는 이미 이러한 전통이 거의 사라진 후였다. 낯선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런 모습을 가까이서 구경하고 촬영하려는 사람들도 있어서 조장을 치르더라도 외부인에게는 철저히 차단한 채로 진행한다고 하였다. 하여, 이런 전통이 있었노라하는 이야기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시신을 가장 높은 곳에 시신을 두는 이유는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요, 새들에게 육신을 허락하는 이유는 하늘로 올라갈 영혼의 무게를 줄이려는 이유 때문이리라. 인간이 먹을 것도 부족한 척박한 땅에서 인간으로서 새에게 풍부한 먹을거리를 보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므로, 그곳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방식을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멀리 있으므로 나와 무관할 것 같지만 또 가끔은 가까운 곳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문득 드러내기도 하는 것이 죽음이다.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나는, 육신을 모두 태워 재로써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 땅의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남을까, 나의 무언가를 필요한 누군가에게 주고 갈 수 있을까. 그보다는 '소풍'을 '재미있는 소풍'으로 만드는 것이 먼저 해결해야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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