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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종 Apr 12. 2022

로마에서의 하루

갔노라. 보았노라. 느꼈노라. 

밟히는 땅 전체가 유적이라고 해도 무색하지 않을 도시, 수 천년의 고대 문화와 최첨단의 현대문명이 공존하는 도시, '로마의 휴일'이라는 영화로 세계 각국 연인들에게 환상과 낭만을 제공하고 있는 도시. 로마를 하루 동안 둘러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로마의 휴일의 배경이 된 트레비 분수

동전을 한 번 던지면 로마에 다시 돌아오고, 동전을 두 번 던지면 사랑이 이루어지며, 동전을 세 번 던지면 연인과 헤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트레비 분수. 수많은 관광객들이 동전을 던지고 그 동전은 유니세프 기금으로 쓰인다고 한다.


'물의 도시, 돌의 도시, 영원의 도시'라고도 하는 로마는 전설에 의하면 기원전 753년 테베레강 연안의 구릉지대에서 로물루스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하나의 도시로 남아있지만, 2000여 년 전에는 지중해 연안의 대제국으로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익숙한 명제들을 남기며 유구한 역사와 문화, 뛰어난 문명의 자취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로물루스에 의해 건립된 로마의 시원지인 포로 로마노 전경

그중에서도 폼페이 유적, 아피아 가도, 지하공동묘지를 돌아보면서 많은 감동과 깊은 의문을 안게 되었다. 과연 인간의 욕망의 끝, 예지의 끝, 믿음의 끝이 어디까지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폼페이는 서기 79년 8월 제정 로마시대에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도시 전체가 화산재에 묻혀버린 비극의 도시이다. 1748년부터 발굴작업이 시작되어 3/5 정도가 발굴되었다. 당시 폼페이는 제정 로마시대의 농업, 상업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도 피서지와 피한지로 유명한 데다 한창 전성기에 갑작스러운 화산 폭발로 매몰되었기 때문에 발굴된 유적들은 당시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폼페이에서 발견된 빵굼터


지금부터 거의 1,900여 년 전에 이미 대리석과 야광석으로 밤길까지 배려한 포장도로, 빗물을 이용하고 음용수를 위한 수도시설, 냉온탕을 겸비한 목욕시설, 가게와 주택이 결합된 주상복합식 가옥구조는 물론 도시 전체가 하나의 바둑판처럼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어 계획도시의 면모까지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많은 관광객의 호기심 어린 눈길을 사로잡는 베티의 집, 비너스의 집 등의 윤락가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폼페이 주택 사이로 뚫린 도로

2,000년 전에 이 지구 상에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마저도 인식하기가 쉽지 않은데, 오늘날과 거의 다를 바 없는, 포장된 도로에 야광석을 박아서 밤길을 표시한 것 등은 오늘날보다 더 뛰어나면 뛰어나지 못하다고는 볼 수도 없는, 그런 선진적인 문명을 발달시키며 살았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보니 정말 충격적이었다.


인류의 문명 또한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것이구나.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이 있기나 한 걸까? 돌고 도는 것이 아닐까? 증명해내지 못할 뿐, 유물을 발견하지 못할 뿐 이 세상은 끊임없는 순환의 작용을 계속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폼페이는 왜 갑작스럽게 잿더미 속에 묻혀버려야만 했을까? 사람이 먹고살만하면 정신이 흐르는 것이 시대를 초월해서 같은 곳으로 흐르는 것일까? 좀 더 편하고, 좀 더 자극적이고, 좀 더 향락적인 곳으로 흘러가는 것일까? 가만히 놔뒀으면, 폼페이 사람들의 욕망은 어디까지 뻗어나갔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로마의 아피아 가도를 밟아본 사람이라면, 그 길을 달려본 사람이라면 로마인들의 앞을 내다보는 예지력에 또 한 번 감탄을 해야 할지 모른다. '도로의 여왕'이라 불리는 아피아 가도는 기원전 312년에 착공한 집정관인 아피우스의 이름을 따라 지어진 것으로, 전체 길이 540㎞에 달하는 고대 로마의 국도인데 지금도 그 길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로마인들은 2,300여 년 전에 어떻게 이 도로를 계획하고 시공을 하였길래 약간의 보수공사만 계속할 뿐 그대로 사용된다는 걸까. 졸속계획, 졸속시공이 난무하는 오늘날 수천 년을 사용해도 무방할 도로를 계획하고 시공해서 사용하고 있는 로마인들의 앞을 내다보는 눈, 튼튼한 시공이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콜로세움 앞의 로마 도로(푸르게 솟아있는 우산 소나무는 로마 제국 시대부터 가꿔온 가로수)


로마 지도자들 눈은 과연 언제까지 내다볼 수 있었던 걸까? 그런 저런 생각을 하며 단지 그 길을 버스로 지나쳤을 따름인데, 집에 돌아와 보니 삶의 템포가 한 단계 느려진 것 같고, 앞날을 계획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조급한 성과에 연연하지 않을 배짱이 생긴 듯하다.


40도에 육박하는 로마에서의 뜨거운 일정을 식혀주는 시원한 유적지를 찾았다. 카타콤이라고 하는 공동 지하묘지가 바로 그곳이다. 로마시대에 황제 외에는 성안에 무덤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재력가들은 조그만 집을 지어 무덤을 만들고, 그것도 없는 평민이나 노예는 매장을 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땅을 파 들어가면서 무덤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카타콤에서 발견된 대리석 관 뚜껑 조각들

그런데 그곳이 바로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시대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기독교 교도들의 피난을 겸한 예배 장소로도 이용되었기에 역사적인 의미와 신앙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신이 준비한 땅'이라고도 하는 그곳은 흙의 특성상 묘지로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쾌적한 공기를 지닐 수 있었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사람들의 생존이 가능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지만, 신앙이 얼마나 중요했기에 묘지에 숨어서까지 그 믿음을 지키려 했던 것일까? 지하 수십 미터 아래였기 때문에 빛이 들어오지 않아 그곳에서 오랫동안 숨어 지냈던 사람들이 발견되었을 때에는 거의 실명한 상태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는 일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사람들을 지하묘지로 이끈 초기 기독교인에게 믿음은 어떤 의미를 가졌던 것일까?


삶이 풍요롭고 윤택해진 현대사회에서 종교는 그 존립과 사명 수행에 위기를 느끼고 있다. 현대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지하공동묘지에 숨어들지 않아도 되고, 익숙한 고향을 버리고 미지의 땅으로 떠나기 위해 메이플라워호에 몸을 싣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설 땅이 좁아지고 있는 현재의 인간에게 믿음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런 인류에게 종교는 과연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로마 기독교인의 믿음의 끝은 어디인가?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날 인류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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