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순하고 천진난만한 예쁜이, 은종이, 쫑이, 은땡이

by 은종

1968년 음력 11월 어느 날, 부산 영도 섬마을에 한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 태어나는 순간 산모였던 엄마는 멀리서 은은한 종소리가 들렸다며 아기 이름을 은 은 자에 종 종을 써서 ‘은종’이라고 했다. 아마도 교회 종소리였을 거다. 성이 김 가니까 ‘김은종’. 그렇게 그녀는 공식적으로 김은종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출현하게 된다.


하지만, 한 겨울 새벽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며 태어난 그녀가 기억하는 최초의 이름은 ‘예쁜이’이다. 그전에 김은종이라고 불린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히 집에서 엄마가 지은 이름으로 불렸을 법한데 그녀는 기억이 없다. 하지만 고모나 동네 사람들이 “예쁜아!”라고 부르며 머리를 쓰다듬거나 예쁘다고 하면서 놀려먹기도 했던 기억이 아련하게 남아있다.


엄마 말에 의하면 그녀가 태어나자마자 옆집 아주머니가 사주를 보고 ‘천복을 타고났다’ 했고, 동네 횟집을 드나들던 손님들이 유독 예뻐했다고 한다. 당시 사진을 보면 정말 뚱뚱해서 목이 거의 보이지 않는데도 말이다. 단발에 멜빵 바지를 입은 그녀의 동그란 얼굴이 그냥 가슴에 붙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예쁘다며 사진을 찍어가기도 하고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고 한다. 그럴 때 “예쁜아!”라고 부르며 이리 오라 저리 가라고 했던 기억이 그녀에게도 어렴풋이 남아 있다.


조금 자라 어른 말을 알아들을 나이가 되었을 때 엄마는 유난히 그녀에게 심부름을 많이 시켰다. 툭하면 “은종아! ~~ 좀 해라.” “은종아! ~~ 좀 해줘.” “은종아! 이리 와봐.” “은종아~~!!” 하도 많이 불러대니까 하루는 엄마에게 이름을 바꿔 달라고 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은종이라는 이름이 부르기 쉬워서 자기만 자꾸 부르는 것 같으니까 이름을 바꿔서 3남매가 평등하게 심부름을 할 수 있기를 바랐던 거다. 그런데 그녀 어머니는 이름과 상관없이 그녀에게 심부름을 시켰을 것이라고 했다. 첫째는 장녀니까 나름 서열상 보호가 필요하고, 막내는 어리니까 일을 시키기가 아까왔기 때문이라는 거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릴 적 엄마 심부름을 통해 그녀는 살림살이에 대한 이치를 조금 일찍 터득한 것 같다. 요리면 요리, 정리면 정리, 주부들이 알고 있을 법한 깨알 살림 비법을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익혔던 것이다. 지금도 어떻게 보면 부잣집 맏며느리가 가장 어울릴 법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 것도 그때 익힌 요리와 살림의 지혜 때문일 거다.


세월이 흘러 초등학교를 들어가면서 은종이는 이름 불리는 일이 많았다. 사교성이 좋아도 너무 좋았던 은종이는 선생님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내고 동급생 친구들과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친하게 지냈다. 초등학교 은종이는 말괄량이 그 자체였다. 초등학교 3, 4학년 쉬는 시간에는 교실 문으로 드나드는 법이 거의 없었다. 창문을 넘어 바깥으로 나다녔기 때문이다. 운동장에서 놀아야 하는데 교실 문을 통해 복도를 거쳐 밖으로 나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기 때문이다. 하루는 친구들과 창문을 훌쩍 넘어 꽃밭을 통과하려는데 선생님께 들켜버렸다. 선생님이 혼내주려고 벼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손을 잡고 왜 창문을 넘어다니나며 혼을 내시는데 선생님 손가락에서 담배 골초에게서 날법한 냄새가 났다. 어찌나 그 냄새가 지독하던지 혼나면서도 담배 냄새나서 못 참겠다며 손을 풀어달라고 하는 당찬 초등생이기도 했다.


어떤 친구들은 ‘쫑이’라고 불렀다. 말끝마다 ‘우리 쫑이, 우리 쫑이’ 하면서 친구들조차 귀여워했다. 초등학교 3학년으로 진급한 후 몇 달 뒤부터는 등교를 했다 하면 걸어 다니는 일이 거의 없었다. 같은 반 친구들이 쉬는 시간마다 역할극을 하며 놀았는데 그녀의 역할이 대가족의 일원인 아기였기 때문이다. 쉬는 시간만 되면 역할극상의 할머니가 업어주고, 고모가 업어주고, 엄마가 업어줬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도시락 먹는 시간에도 친구들이 아기에게 떠먹여 줬다. 역할이 아기니까 그녀 손으로 먹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고분고분 떠 먹여주는 도시락을 받아먹으며 쫑이는 수업시간의 은종이와 쉬는 시간의 쫑이 아기를 오가며 성장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은종이는 자기감정에 솔직했다. 5학년이 되면서 은종이는 이성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같은 반도 아니고 옆반에 잘 생긴 남자아이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얼굴도 잘 생겼지만 인기도 많아서 나중에 6학년이 되어서는 전교 회장이 되었다. 아무튼 은종이는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남학생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쑥스러워서 말도 한 번 못 걸고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솔직하니까 그 사실을 같은 반 친구들도 다 알았다. 여자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그 애를 보러 가자고 동행해 주었고, 남자아이들은 자기들 놔두고 옆반 남자아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심술도 부리지 않았다. 그래서 수업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는 옆반 남자아이 바라보며 놀고, 수업이 끝나면 같은 반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때로는 공터에 가서 야구를 하기도 하고, 고무줄놀이도 하고, 딱지놀이도 하면서 신나게 놀았다. 당시만 해도 여자 아이들은 야구를 같이 하지는 않았다. 야구를 잘하는 남자아이들은 야구를 하고, 야구 못하는 남자아이들이 그 옆에서 여자 아이들과 놀았다. 그녀도 부러진 야구 방망이를 가지고 놀거나 공 던지기 놀이를 하며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씩씩하게 잘 놀았다.


담임 선생님도 은종이를 예뻐했다. 반 친구가 아파서 학교에 못 오면 선생님을 대신해서 문병을 다녀오라는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다. 은종이는 선생님의 심부름도 잘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하루는 문병을 갔는데 완전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에 친구집에 가서 친구 부모님이 깜짝 놀란 적도 있었다. 은종이가 바닷가 친구 집에 가다가 바다에 들러 게잡이를 하다가 친구 집에 너무 늦게 갔기 때문이다. 학교 근처에서 낚시질하는 아저씨에게 물고기를 얻어 나무젓가락에 묶어서 방파제 사이를 돌아다니는 게를 잡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은종이는 학교, 바닷가, 친구 집. 세상 모든 곳이 놀이터였다. 붙임성이 좋아 아무에게나 말을 걸고 필요한 건 다 얻어서 놀고 싶은 대로 실컷 놀며 천진난만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6학년 때 선생님은 은땡이라고 불렀다. 친구들도 그렇게 불렀다. 은종의 애칭이 자연스럽게 은땡이가 된 것이다. 체육과목을 맡았던 담임 선생님 또한 아이들 눈높이를 맞춰주는 너무 멋진 선생님이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선생님은 아이들과 도시락을 함께 먹었다. 책걸상을 길게 붙여 파티처럼 도시락을 함께 먹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그녀 반 모든 학생들을 책상 위에 올라가서 의자를 들고 있는 벌을 서게 했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하지만 무슨 일이었는지 선생님이 단단히 화가 나서 아이들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하는 벌을 줬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하는 일이지만 그때는 가능했다. 워낙 좋은 선생님이라 분명히 이유는 있었을 것 같은데 은종이는 납득할 수 없었다. 단체 벌이니까 벌을 받을 수는 있지만 신체적 가격을, 그것도 얼굴을 건든 사실을 도저히 용납하기가 어려웠다. 그때부터 은종이는 선생님을 외면했다. 눈 길도 주지 않고 더 이상 도시락도 같이 먹지 않았다. 선생님은 화해하고 편안하게 지내고 싶어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은종이를 불렀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은종이는 ‘다시는 얼굴에 손대는 일은 있으면 안 된다고 약속하자고 했다. 선생님은 약속했고, 그때 이후로 단체벌을 심하게 주지 않았다. 그렇게 은종이는 6학년 담임 선생님을 깊이 신뢰하게 되었고, 그 관계는 고등학교까지 이어져서 선생님 결혼식에도 참석하게 되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은종이가 처음 천 책을 시판하게 되었을 때 그때의 선생님 기억나서 학교에 전화를 했다. 선생님은 전근을 가서 다른 학교에 있었지만 30을 훌쩍 넘긴 은땡이의 목소리를 단번에 기억했다. 뿐만 아니라 은땡이는 잊었지만 선생님은 잊을 수 없다며 다른 기억을 전해주었다. 은땡이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스승의 날에 초등학교 선생님께 장미꽃을 갖다 주던 아주 명랑한 학생이었다고. 평생 잊을 수 없는 학생이라고 했다.


은종이는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사교성이 뛰어났다.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해서 학교 끝나면 친구집을 옮겨 다니며 놀다 오곤 했고, 때로는 친구집에서 자고 오는 날도 많았다. 나이 40에 서울로 임지를 옮겨 이사 오는 날, 재경 동문회를 한다며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이 모였다. 기억나지 않는 남자아이들이 반말을 하며 친한 척을 하는데 어색하기도 했지만 반가운 마음에 오랜만에 긴 시간을 같이 보냈다. 신기한 건 거기 모인 친구들 중에 그녀가 안 가본 집이 거의 없었다. 그녀도 잊고 있었지만 그녀의 학창 시절은 정말 정말 사교적으로 교우관계가 활발했다. 공부에 별 관심이 없던 은종이도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공부에 취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반에서 10등 안에만 들면 상관없었던 은종이에게 목표가 생긴 것이다. 반에서 1등. 목표가 생기니 은종이는 밤을 새우는 일이 늘어났고 중학교 3학년이 된 후로는 반에서 1등을 거의 놓지 않았다. 고등학교 갈 때에는 당시 연합고사에서 3 문제를 틀려서 여고에 공동 1등으로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때 이후 은종이는 1등 병에 걸리게 된다. 그때부터 시험을 봤다 하면 전교 1등은 못해도 반에서 1등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된 것이다. 그렇게 은종이는 고등학교 3년을 반에서 1등 자리를 놓치지 않고 성적을 지켜나갔다. 공부만 한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좋아했던 옆반 남자아이는 학생 회장이 되면서 더 가까이하기가 어렵게 되었고, 중학교를 여중으로 오면서 은종이는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 다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게 된 거다. 바로 수학선생님. 수학 선생님도 은종이를 무척 아꼈다. 안타까운 건 은종이가 수학을 못한다는 거였다. 잘하는 것이 아닌 것이 아니라 아예 못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은종이를 예뻐했고 은종이도 수학선생님을 좋아했다. 그렇게 고1 때 수학 선생님과 학생으로 만났지만 고2가 되면서 급장과 담임 선생님으로 좀 더 가까운 관계로 만나게 된다. 은종이는 선생님 좋아하는 마음을 성적을 지키는데 연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고, 선생님이 좋은 것도 무시할 수 없어서 은종이는 결심했다. 월요일마다 시험을 보기 전날 밤샘을 하면 은종이네 앞마당에 핀 꽃을 선생님 교무실에 갖다 드리고 일찍 자버리면 꽃도 안 갖다 드리는 걸로 스스로 규칙을 정한 거다. 은종이는 대체로 일요일마다 밤을 새워 공부했고, 월요일 새벽엔 마당에 나가 행복한 마음으로 꽃을 꺾었다. 다른 선생님을 보기 전에 교무실 담임 선생님 책상에 꽃을 놔드려야 하기 때문에 은종이는 시험 보는 월요일엔 학교도 일찍 갔다. 선생님께 꽃 드릴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물론 반에서 1등은 놓치는 일이 없었다. 은종이가 선생님께 가끔 꽃을 드렸다면 선생님은 은종이에게 누런 서류봉투에 모아 둔 초콜릿과 음료수를 살짝살짝 챙겨주셨다. 당시만 해도 여고에는 ‘반짝이’ 문화가 있었다. 수업시간 자기가 좋아하는 선생님을 찜해서 공포하고 그 시간 음료나 초콜릿은 자기가 전담하며 애정공세를 퍼붓는 거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인정해서 인기 많은 선생님 수업시간엔 어김없이 초콜릿이나 음료수가 교탁에 놓여있었다. 수학 선생님은 다른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그러니 초콜릿과 음료수는 언제나 풍년이었다. 그걸 모아서 선생님은 은종이에게 서류 봉투에 담아 다른 학생들 보지 않게 살짝살짝 챙겨주었던 것이다. 심지어 저녁 야간 학습을 마친 어느 날 선생님은 숙직이라며 오토바이로 집에 까지 바래다준다고 했다. 은종이로서는 태어나서 처음 타는 오토바이였다. 타는 법도 몰랐지만 선생님께서 집에 데려다주신다니 망설임 없이 냅다 올라탔다. 하지만 순간 당황했다. 어디를 잡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토바이에는 뒤에 타는 사람이 잡을 수 있는 손잡이나 거치대 같은 것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선생님 배를 양팔로 감싸 잡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물컹하고 잡히는 선생님 뱃살. 선생님 좋은 것과 뱃살의 물컹한 느낌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집에 까지 가면서 그 어색함이란. 그래서 은종이는 속으로 다짐했다. ‘앞으로 누가 됐던 오토바이 뒤에는 타지 않으리라.’


하지만 천진난만하고 성실했던 고2 은종이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고3이 다가올수록 어린 시절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이 자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은종이는 7살에 원불교 교도가 되었다. 신심이 깊은 엄마의 인연으로 원불교 입교(원불교 정식 교도가 되는 절차)를 했기 때문이다. 입교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 이후 어린이 법회를 보거나 행사 때 교당을 다니게 되면서 “크면 원불교 교무님이 되겠다”라고 덜컥 약속을 해버렸던 것이다. 원불교 교도는 많지 않기 때문에 교당을 다니는 어린이도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교당 다니는 어린이들은 교무님이나 교도님들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는다. 그중에서도 ‘커서 교무님이 되겠다는 아이들’은 특별 관리 대상이다. 총부에서 어른님들이 오거나 평소 주임 교무님에게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이다. 은종이도 그 관심과 사랑이 좋았다. 그래서 쉽게 약속을 해버렸다. 스스로의 앞날이나 성직자의 길에 대해 깊은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그저 특별한 관심과 사랑이 좋고, 어린 시절 언니 오빠나 교당 분위기가 좋으니까 안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어린 은종이에게 당시 원불교 교당은 세상 전부였으니까 딱히 다른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심각한 위기에 맞닥뜨렸다. 원불교 여자 교무님은 결혼을 안 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못하는 거고 그렇게 결혼을 못하는 여자 교무님이 되기 위해서는 원불교학과 기숙사에서부터 남다른 생활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고2가 되자 비로소 성직자가 된다는 것이 친구들과 얼마나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지 현실적으로 와닿으며 그것이 은종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길이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말해버렸는데 지금 와서 안 한다고는 못하는 거다. 고2 은종이는 내심 좌절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고, 스스로 입으로 내뱉어 버린 약속을 어길 수도 없고,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하기로 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새앵은 나의 것. 그냥 나에게 맡겨주세요~~’


당시 유행하던 민혜경의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노래 가사가 그녀를 괴롭혔다. 토요일마다 학생법회를 보러 교당에 갔고, 법회를 마치면 교당에서 교무님과 함께 잤다. 어린 은종이에게 교당에서 혼자 주무시는 교무님이 안쓰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은종이가 다녔던 교당에는 학생, 청년들이 많았다. 거의 60명이 넘는 중고등학생과 청년 대학생들이 토요일 법회를 보러 교당에 왔다가 저녁이 되어 교당 대문을 빠져나가면 여운이 남았다. 사람은 가고 없는데 기운이 남아서 웅성 웅성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런 곳에 은종이가 보기에 어려 보이는 여자 교무님을 혼자 남겨두고 온다는 것이 마음이 쓰였다. 당시 은종이 다니던 교당 교무님이 38살이라고 소문이 났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교당의 주임 교무가 너무 어려 보일까 봐 일부러 거짓 소문을 퍼뜨린 거였다. 하지만 하지만 은종이의 눈에는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속상한 일이 있을 때나 해결해야 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혼자 앉아계신 교무님을 보거나 평소 교무님의 어떤 모습을 보더라도 38살의 중후한 느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은종이 자신도 교무님이 되어 교당에 갔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법회를 보러 왔다가 저녁이 돼서 썰물 빠지듯 갑자기 다 사라지고 홀로 남는다면 뭔가 허전한 느낌을 달래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동병상련의 심경이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은종이는 토요 법회를 마치면 저녁에 교무님과 교당에서 자고 일요일 집으로 돌아와서 밤을 새우고 월요고사를 보았다.


고3이 되니 조금 더 저항감이 심해졌다. 어떻게든 곧바로 성직자가 되는 원불교학과에 바로 진학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잘 아는 교당 오빠들도 엄마와 교무님을 설득하는 걸 거들어 주기도 했다. 은종이는 어차피 원광대학교를 가야 한다면 한의대를 먼저 졸업하고 원불교학과에 편입을 하면 어떤지 제안을 했다. 어떻게든 곧바로 성직자의 길로 들어서는 걸 유보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교무님도 엄마도 이왕 교무님이 되려면 빨리 시작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했다. 동시에 엄마의 한 마디가 그녀의 마음을 돌아서게 했다.


“한국에서 여자의 삶은 추천하고 싶지가 않아. 가정에서 주부로 살면서 한 가정만 돌보면 사는 것보다 창공을 나는 한 마리 새처럼 자유롭게 한 생을 살아보는 게 낫지 않을까?”


다 맞는 말이고 멋진 말이었다. 그중에서도 은종이는 ‘자유’라는 단어에 곧바로 공명했다. ‘그래. 자유. 한 마리 새처럼 자유롭게. 이 얼마나 멋진 일이야?’ 그렇게 은종이는 흔쾌히 원광대 원불교학과에 진학하리라 마음을 먹고 성직자의 길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때까지 그녀는 몰랐다. 원불교학과에 들어가면 은종이라는 이름을 거의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젠 준영, 7살에 받은 원불교 법명인 김준영으로 주로 불릴 거였다. 그렇게 은종이는 준영이가 되었다.

.





.









.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1화프롤로그_지금까지 알고 있는 나가 진짜 내가 아니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