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종이는 성직자의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였고, 성직자가 되면 속세와는 완전히 단절되는 줄 알았다. 째깍 째깍. 은종이에게는 얼마남지 않은 속세에서의 시간들이 초를 다투며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아쉬울 수도 있는 이 시간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은종이는 결심했다. 원불교학과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 얼마남지 않은 시간을 속세를 경험하는데 온통 할애하자. 속세 삶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성과의 만남, 일단 남자 친구를 사귀어 보자. 당시 수능 마치고 유행하던 반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반팅이란 여고생과 남고생이 반 전체로 미팅을 하는 것이다. 단체 미팅 중재자가 있어야 하니까 실장이었던 은종이와 부실장이 같이 남고반 실장과 부실장을 만났다. 일단 학급 대표들이 먼저 만나서 관계를 트고 천천히 반팅을 준비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우리 넷은 친구들 눈을 피해 멀리 가기로 했다. 당시 1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경주에 놀러 간 것이다. 경주까지 간 것은 좋았다. 신났다. 하지만 은종이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김이 빠졌다. 함께 나온 남학생 실장 부실장이 은종이네 부실장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둘다 부실장 환심을 사려고 경쟁하듯 대화를 이어가는 상황에 은종이는 상처 아닌 상처를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은종이네 부실장은 키도 훤출하게 크고 치아교정도 하고 얼굴도 하얗고 예뻐서 언뜻봐도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예뻐서 대학 가서는 이대 메이퀸에 뽑히기도 했다. 그렇게 미인과 함께 동행을 했으니 결과는 뻔헀다. 결과적으로 은종이의 첫 남자 친구 사귀 프로젝트는 참담히 끝나버렸다. 눈치없는 두 남학생들이 은종이의 마음은 아랑곳 않고 오직 본능에 충실한 모습을 은종이로서는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은종이는 그날 밤 일기장에 가슴의 상처와 교훈만 남길 뿐이었다. “나는 외모가 딸리니 내모라도 멋지게 가꿔서 매력적인 사람이 되어야 겠다.“ 남자 친구를 사귀기도 전에 일찍부터 연애의 쓴 맛을 보며 세상 살아가는 이치를 터득하기 시작했다. 얼굴로 안되면 성격으로라도 승부를 내야 한다는 걸 고3 수능 후에 알아버린 것이다. 어쩌면 은종이는 그 때 이후로 더 환하게 자주 웃는 습성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또 다른 예상 밖의 상황이 발생했다. 친구나 선생님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멀리 경주까지 놀러 갔는데 하필 그 때 경주로 놀러온 선생님 가족들 눈에 띄어 학교에 소문만 무성하게 되어 버렸다. 선생님들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 경주까지 남학생들과 놀러 갔다면서? 벌써 남자 친구 사귄거야?“ 4명이서 경주까지 놀러간 정황이 들켜 버렸으니 소문만 무성하고 정작 은종이는 남자 친구 사귈 의욕을 잃어버렸다. 그러고 보면 은종이는 남자 친구 사귀는데 소질이 없었다. 초등학교 남자 아이도 멀리서 바라볼 뿐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고 끝나버린 거니까. 아무튼 아무리 속세를 제대로 경험하고자 해도 상황상 남자 친구 사귀는 일은 영원히 틀어져 버렸다.
다음에는 알콜이었다. 일명 술. 은종이 생각에 속세와의 인연을 끊기 전에 술의 세계도 반드시 경험해야 할 중요한 영역이었다. 호기심 많은 은종이가 지금이 아니면 영영 끝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길어봤자 2달 내외의 기숙사 입사 전까지의 시간 동안 술을 경험하려면 아에 쎈 것을 마셔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술 가게를 하던 지인에게 부탁을 했다. 위스키를 맛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미성년자였지만 그 지인은 어린 은종이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곧 속세를 청산하고 출가를 해야 하는 아이이의 부탁이었으니까. 술 가게를 하는 지인 덕분에 다양한 술을 한 자리에서 마셔볼 수 있었다. 위스키를 그냥도 먹어보고, 얼음을 넣어서 흔들어 먹어도 보고, 와인도 마셔보았다. 샴페인도 마셔보고, 소주도 맛을 보았다. 막걸리는 이미 어릴 때 할머니 드시는 걸 맛보았기 떄문에 그 땐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미성년였는데 친구들과 어떻게든 술을 마셔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친구집에 있는 술을 먹어보기도 하고, 맥주 정도는 쉽게 마실 수가 있었다. 술에 취한 적은 없지만 맛 보는데 의의를 두고 경험을 해 본 것이다.대체로 친구들과 맥주나 생맥주를 마시고 흔적없이 귀가를 했지만, 어떤 날에는 맥주 냄새를 풍기며 집으로 돌아오는 날도 있었다. 심지어 어떤 날엔 교당에도 술냄새를 풍기며 갔었다. 언니가 거기서 간사로 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수중에 돈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거였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 하나 있는 남 동생이 눈치를 채고 자기 용돈을 주며 그녀가 속세 경험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아낌없는 지원을 했다. 하지만 술이라는 게 은종이에게는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일단 모든 술은 쓰기 때문에 술술 넘어가지 않는다. 위스키나 포도주 등은 입안에 번지는 향기가 다르니까 호기심에 그 맛과 향을 음미할 수는 있지만, 소주는 강한 인공향이 느껴졌고, 맥주는 똑 쏘는 시원한 맛이 조금 매력적이긴 하지만 마시고 나면 트림이 자주 나왔다. 별로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특히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열감이 올라온다는 것이다. 알콜 때문인지 마시자마자 식도를 타고 위까지 내려가는 동안의 그 뜨거운 느낌도 좋은 느낌이 아니지만 조금만 마셔도 금방 얼굴에서부터 열이 나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지어 먹고 나면 다음날 속도 편하지 않다. 이렇게 별로인 것을 세상 사람들은 왜 많이들 마시는지 은종이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후로 은종이는 술자리가 있어도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렇다고 술을 나쁜 음식으로 간주하지도 않지만 궂이 쓰고 열 올라오고 다음날 속이 좋지 않을 음식을 먹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안마실 뿐이다. 그래서 가끔은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작은 잔에 0.5mm나 1cm 정도는 함께 마신다. 모든 음식이라는 게 그 때 그 때 맛이 다르고, 남들도 먹는 음식을 죄악시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이고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속세에서의 술 경험은 간단히 끝이 났다. 뒷날 사람들이 말했다. 술은 취하는 맛이라고. 맨 정신의 세계로 마주하기 어려운 다른 차원의 세계로 넘어가는 마법을 위해 복용하는 알약 같은 것이라고.
한편 그녀가 수능 후 학창 시절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교당 주임 교무님은 기숙사 입사하기 전에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과 좌선, 교당 생활 등에 적응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며 교당에서 아침 좌선을 함께 할 것을 권유하셨다. 그녀는 그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단순 발랄한 은종이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평생하게 될텐데 뭘 지금부터 연습을 해요. 그 때 가서 할께요.“ 그렇게 은종이는 성직자의 길에 대한 예비 연습없이 준비없이 다음해 2월 곧바로 익산에 있는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기숙사에 입사하게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경상남도 부산에서 태어나 전라북도 익산으로 가는 건 어린 나무를 이식하는 것과 같다. 결이 다른 토양으로 옮겨 심는거나 마찬가지 인거다. 은종이에서 준영이으로 이식되는 것이다. 이제 은종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준영 교우라고 했다. 준영이라는 원불교 벗인 셈이다. 준걸 준, 영화 영, 영화로운 준걸인 원불교 벗. 이렇게 되는 것이다. 입사한 준영 교우 눈에 비친 첫 장면은 기숙사라고 이름붙인 건물 앞, 우물가를 지나가는 커트 머리에 회색 자켓을 입은 어떤 여학생이었다. 그 다음 눈에 띈 건 밤이 되어 너무 깜깜해서 앞이 보이지 않는 거였다. 너무 깜깜한 밤이 그날 당장 밤마다 아름답고 생기있게 빛나던 부산을 그립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떠나보면 안다. 익숙해서 느끼지 않았던 소중한 것들에 대해서. 준영이는 기숙사의 첫날부터 부산 바다와 하늘이 펼치는 아름다운 여명과 일출, 노을과 일몰, 아름다운 도시를 그리워했다. 그 그리움은 은종이에게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왔다는 걸 실감하게 했다. 이제 이 깜깜한 낯선 동네에서 가족도 없이 혼자 적응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 깜깜한 밤이 혼자라는 사실 또한 각인 시켰다.
또 한가지는 남자와 여자를 엄격하게 구분한다는 사실이었다. 법당을 들어가거나 밥을 먹으러 가면 항상 남자와 여자를 신비의 바닷길 열리듯 두 갈래로 나눈다는 거였다. 그 점도 준영이는 낯설었다. 이렇게 남녀를 극명하게 나누는 문화가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몰랐지만 준영이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은종이로 살던 세계와 다른 남녀관이 지배하는 세상에 들어섰음을. 그때만해도 준영이는 대수롭지 않게 간단히 의문을 품고 넘겼다. ‘왜 꼭 이렇게 해야 하는 거지?’ 아무튼 속세에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예비 성직자 과정에 들어왔으니 다른 세계에 온 것임은 확실했다. 그런데 원불교 중앙총부와 거리적으로 멀고, 교무가족이나 친척이 없는 우리 가족으로서는 이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다. 기숙사 입사 준비물 중에 털신이 있었는데, 다른 여학생들을은 어떻게 알고 모두 남자 털신을 가지고 왔다. 요즘도 절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남자 털신을 준비해 온 것이다. 이런 공동체 생활을 잘 모르는 준영이만 여자 털신을 가지고 왔다. 대각전이나 영모원 등 실내에 들어갈 때 벗어놓은 신발을 보면 준영 교우 털신이 유독 눈에 띄었다. 모두 검정 고무 재질에 거친 털이 보이는 털신을 벗어 놓았는데 준영 교우만 유독 파란 코듀로이 재질에 짧고 좀더 섬세한 털이 있는 여성용 털신을 벗어놓았기 떄문이다. 신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설펐다. 함께 신입생 훈련을 났던 동기 남학생이 그 때의 준영 교우를 꿔다놓은 보리 자루 같았다고 했다. 어색하고 적응안되고 모르는 것 투성이인 세상에 던저진 준영교우는 당연히 그렇게 비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새벽 기상이었다. 원불교학과에 입학을 하면 맨처음 신입생 훈련이라는 강도 높은 적응 훈련이 있다. 기숙사에서는 새벽 5시 전에 기상을 하고 좌선과 구보, 청소, 아침식사를 이어서 마친 후 각종 프로그램이 이어져서 밤 9시 반이 되어야 끝이 난다. 이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며 평생 일어나 본 적이 없는 새벽 5시에 매일 일어난다는 일이 그녀에겐 큰 도전이었다. 5시에 일어나 좌선을 마치면 바로 이어서 구보를 한다. 새벽에 날씨가 추우니까 보통 좌선을 마치면 잠깐 방에 들러서 좌복이라고 하는 방석 위에 어깨를 걸치는 솜으로 누빈 담요 비슷한 것을 벗어놓고 나간다. 신입생 훈련은 기강이 센 훈련이어서 대부분의 신입생들은 좌선과 구보에 결코 빠지는 적이 없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그녀는 14일의 신입생 훈련동안 구보를 몇번이나 빠졌다. 빠지려고 마음 먹고 빠진 적은 없었다. 좌복을 방에 갖다놓으려고 잠시 방에 들렀다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이불과 좌복을 안고 깜빡 잠에 들어버리는 것이다. 잠만 자는 것이 아니라 꿈도 꾼다. 동기들이 아침 구보를 나갔다가 비가 와서 젖은 옷을 털며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기 때문이다.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꼭 같은 꿈을 꿨다. 꿈에 비가 와서 구보를 안하니 마음 놓고 깊이 잠 들어 버리는 것이다. 뒷날 훈련방장이 말했다. 신입생 훈련 때 구보빠지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그렇게 준영 교우의 원불교학과 기숙사 적응은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학년 막내였기 때문에 또 조금 봐주는 것도 있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입학을 했지만, 사회 생활을 경험하다 들어온 동기들도 많았기 때문에 대부분이 준영 교우보다 나이가 많았다. 많게는 12살 많은 사람이 둘이나 되었다.
어리다고 봐주는 것도 있었지만, 어려서 겪어야 하는 구설도 따라다녔다. 원불교학과를 들어오려면 일반적으로 2년동안 간사 생활을 해야 한다. 원불교 교당이나 기관에서 관습과 문화를 익히며 봉사를 하면서 성직자 길에 들어설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또한 그런 과정을 거치면 육영생이 되어 원불교 교단에서 학비와 생활비, 용돈까지 모든 것을 지원한다. 그렇게 공인으로 육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은종이는 그런 과정을 겪지 않았다. 원광대학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4년간의 학비와 기숙사비 일체를 장학혜택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준영교우는 2년의 과정을 생략한 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입학을 한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이렇게 생략한 2년이 원불교학과에 입학한 후 4년내내 구설을 따르게 했다. ”너, 간사 안했어? 앞으로 어쩌려고 그래? 간사 안한 사람들 중간에 엄청 나갔는데?“
아무튼 신입생 훈련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또 다른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교수님들 말씀을 알아 듣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강단 고저의 억양이 확실한 부산 사람에게 전라도 말이 너무 강약이 없어서 수업시간에 졸리기 일쑤였다. 더 문제는 사용하는 단어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못 알아듣는 말 투성이었다. 원불교학과니까 종교를 신앙으로 배우지 않고 학으로 배우니까 기본적인 불교학적 배경지식이 없으면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수업들이 많았다. 그래서 준영이는 수업시간에 수도 없이 졸았다. 새벽에 일어나는 일이 너무 힘들었던 준영이는 기숙사에서의 일과를 마치고 피곤이 몰려올 때쯤 대학 수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수업시간에 정신을 차려보니 교복 깃이 온통 파란색 볼펜 낙서로 얼룩져있었다. 수성 볼펜을 든 채 졸다가 머리가 흔들리면서 한쪽 교복에 온통 파란 낙서를 해 놓은 것이었다. 아무리 졸지 않으려 해도 기숙사와 학교 일정을 동시에 소화해내기에는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피곤에 찌든 대학 새내기 준영 교우. 그렇게 매력적일리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시간이 갈수록 준영 교우는 또 엄청난 벽을 마주했다. 여기숙사의 엄청난 기강. 결혼 안하는 여자 교무님이 되기도 전에 기숙사에서부터 일명 단도리가 시작되는 것이다. 흰색과 검정색, 회색 등의 무채색 위주의 단색 옷을 입어야 하고 줄무늬나 무늬, 멋이 들어간 디자인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 기강을 몰랐던 준영 교우에게 옷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선배들이 ‘디자인이 그게 뭐야? 파란 라인이 있는 점퍼를 입으면 어떻게 해? 줄무늬있는 옷은 안되는지 몰라? 등등. 옷 뿐 아니라 소지품, 그러니까 양산이나 신발, 가방 등 모든 수용품의 디자인이나 색깔이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예전에 입던 옷이나 수용품은 하나도 사용할 수 없는 지경이었고, 게다가 외출 구역도 정해져 있었다. 평일에는 앞쪽으로는 봉황 목욕탕, 뒤쪽으로는 철길을 넘어가면 안되는거였다. 혹시라도 그 영역을 벗어나면 사외출이라고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준영 교우의 눈에는 이런 형식이나 제약들이 성직자의 길을 걷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적이었다. 그런 시선으로 공동체와 단체생활을 보니 곳곳에 불합리가 존재하고 있었다. 준영 교우를 더 당황스럽게 한 건, 남학생들의 복장과 자유였다. 같은 원불교학과 교우들이지만 결혼에 구애가 없는 남자들은 옷의 디자인이나 색깔, 헤어스타일, 외출 구역에 어떤 제한도 없었다. 심지어 대학에서 다른 학과 여학생들과 미팅하는 것도 허용이 되었다. 같이 좌선하고, 청소하고, 밥 먹고, 학교를 다니던 동기 남학생들이 미팅을 하고 온 날 준영 교우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어떻게 이렇게 다른 대우를 받는지, 남.녀.차,별. 이제 준영 교우는 불합리에 더해진 남녀차별 문제에 점점 예민해져 갔다. 성직자의 길과는 무관해 보이는 것들이 너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영 교우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1학년 겨울, 준영 교우는 결심을 굳힌다. 그녀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일단 멈추어야 한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휴학을 결심했지만 결론은 불발이었다. 그녀의 엄마가 미리 감지하고 전화를 걸어서 방학하면 부산으로 바로 내려오라고 한 것이다. 부산에서 엄마를 만나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휴학을 포기하고 대학생활을 이어가기로 한다. 불퇴, 물러설 수 없다면 내 길을 찾아야 한다. 그녀는 고심했고, 방향을 바꿨다.
그녀는 결심을 굳힌다. 주위를 돌아보지 말고 깨달아 버리자. 깨달아서 그녀가 꿈꾸었던 창공을 나는 한 마리 새와 같은 자유를 스스로 성취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이제 스스로의 일과를 촘촘히 관리하며 깨달음의 길에 집중하기로 했다. 혼자서 중앙총부 소나무숲을 거니는 일이 늘어났고, 걷다가 소나무에 기대 앉아 명상을 하는 시간이 잦아졌다. 새벽에 좀 더 일찍 일어나서 차가운 푸른 하늘에 빛나는 달빛, 별빛을 보며 좌선을 나가는 날들이 늘어났다. 기숙사의 규칙 때문이 아니라 이제는 그녀 스스로 깨댤아야 한다는 목표가 생긴 것이었다. 방학때도 집에 가지 않았다. 기숙사에 남아서, 때로는 혼자 남아서, 교고총간이라고 하는 원불교 초기 교서를 탐독했다. 혼자 일일이 요약하며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 당대의 역사와 공동체 생활, 교육, 교리의 체계화 과정에 대해 스스로 공부를 한 것이다. 그렇게 초기 교서를 혼자서 독파한 다음, 원불교 전서라고 하는 원불교 경전 모음집을 정전, 대종경은 물론이고 성가 가사까지도 일일이 공부했다. 원불교가 형성되는 과정에 공동체 일원들이 느꼈을 진리 공부에 대한 희열, 세상을 향한 발심과 구도심, 세상의 이치에 대한 많은 것들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원불교학과 수업시간에 배우기 어려운 원불교에 관한 원서를 혼자서 3년동안 독파한 것이었다. 그렇게 책으로 먼저 독파한 후, 질문에 들어갔다. 구성원들, 그러니까 이론적으로 밝혀진 원불교의 교리와 법이 실제 현존하는 원불교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효과가 나타나는 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접할 수 있는 선배, 특히 연세가 많은 고참 선배님들에게 기회가 될 때마다 질문을 했다. 원불교가 마음 사용하는 법을 가르치는 종교라고 하니 마음은 어떤 것이냐? 마음을 경험해봤냐? 경험을 하면 어떤 변화가 오느냐? 마음을 제대로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런 질문들을 쏟아내었다. 하지만 시원한 대답을 얻기가 어려웠다. 누구의 탓인지 모른다. 그분들이 몰랐거나 준영이가 알아들을 수 없었거나 둘 중에 하나일거다.
아무튼 누구 탓인지는 알 수 없지만, 준영이의 가슴 속에 새로운 답답함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쉽게 안 깨달아진다는 사실. 젊은 열정에 비해 깨달음이 그렇게 어렵다는 사실이 그녀를 좌절하게 했고, 해마다 4월이 오면 스트레스를 받았다.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대종사는 26세에 깨달음을 얻었는데, 당시보다 훨씬 정보도 많고, 그 분이 직접 만든 교재와 프로그램과 정보들을 가지고도 못 깨닫는다는 게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설렁설렁 한 것도 아니고 열심히 독파했고, 고된 기숙사 생활을 견디며 아침 저녁으로 소태산 대종사가 내 놓은 프로그램에 따라 시키는대로 하고 있는데 깨달음이 얻어지지 않는다는게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엄청난 스트레스가 되었다. 특히 원불교에는 4월 28일을 대각개교절이라고 해서 큰 행사를 하는데, 해마다 4월이 되면 학년이 올라가도 깨달아지지 않는 것에 대해 스트레스가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4학년 4월이 되었을 때 곧 졸업을 하고 성직자의 길에 들어 다른 사람을 지도해야 하는데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고 뭘 가르칠 수 있을지 준영이는 조급해졌다.
그렇게 별 소득없이 원불교학과를 졸업한 준영이는 학생의 신분을 넘어 예비 교무로서 본격적인 성직자의 길에 들기 전 현장 실습이 많은 동산훈련원 훈련 교무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그 기간 또한 깨달음에 획기적인 진척이 없었다. 방법도 몰랐다. 열정도 식었다. 열정이 식은 후에는 기억도 없다. 훈련교무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나는 일이 거의 없다. 앞으로 하게 될 지도 모르는 때를 대비해 운전면허증을 땄다는 거. 깨달음은 모르겠고, 운전면허증 하나 달랑 들고 훈련 교무 시절을 마감하고, 본격적인 성직자의 길에 들어서며 준영 교우는 준영 교무가 된다. 교우에서 교무로 이젠 예비를 떼고 본격적인 성직자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어렵고 힘든 삶만 있는 건 아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어둠이 있으면 빛도 있기 때문이다. 준영이의 원불교학과 학창 생활 또한 낯설고 힘든 면만 있었던 건 아니다. 다행히 조건없이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세상과 공동체를 버텨주는 힘이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준영이에게 그런 사랑이 있었다. 아무말 안해도, 밥만 같이 먹어도 마음이 오고 가는 한결 같은 선생님들의 사랑. 받은 것 없이 기대하고, 지지하고, 응원해 준 선배, 동기 교우들의 사랑이 준영이를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비록 준영이는 성직자에게 필수라고 생각했던 손에 쥘 만한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런 사랑 덕분에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더욱 분명해진 질문과 함께 본격 성직자의 길 준영 교무로 성장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문제를 풀지 못하고는 창공을 나는 한 마리의 새와 같은 자유는 불가하다 여기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