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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상법어와 무시선, 그리고 마하무드라

_하나의 진실로 흐르는 세 갈래의 길

by 은종


우리가 삶을 깊이 들여다보면, 종교와 전통의 구분을 넘어 똑같은 핵심을 향해 나아가는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원불교의 일원상과 무시선, 그리고 티베트불교 전통의 마하무드라 역시 같은 중심을 가리키며, 각기 다른 문장과 수행법으로 인간의 근원을 설명합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언어가 가리키는 곳은 ‘마음의 본성’이라는 동일한 자리입니다. 이 글에서는 세 전통의 관점을 하나로 바라보며, 그 공통성과 차이를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1. 근원에 대한 이해 — ‘일원상’, ‘자성’, ‘마음의 본성’


원불교에서 일원상은 우주 만물의 근원이며 모든 중생의 본성이라고 말합니다. 일원(一圓)은 둘로 나눌 수 없는 원래의 자리, 즉 분별 이전의 순수한 자리를 상징합니다. 원불교는 이 자리를 “마음의 근원”, “생명의 바탕”, “지혜와 자비가 자라는 뿌리”라고 설명합니다. 모양이 없고, 둘이 없으며, 처음과 끝이 없는 자리. 그 자리는 항상 존재하지만 우리가 분별과 번뇌 때문에 알아채지 못할 뿐이라고 봅니다.


무시선 또한 같은 근원을 이야기합니다. 다만 ‘시간이 없는 선’, 다시 말해 ‘언제나 존재하는 본성’으로 설명합니다. 무시선의 핵심은 본성의 작용은 한순간도 끊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앉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이 본래의 성품을 드러내는 장이라는 관점입니다. 원불교의 일원상은 “본성은 하나”라고 말하고, 무시선은 “본성의 작용은 끊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같은 뿌리를 가리킵니다.


마하무드라도 마찬가지로 마음의 본성을 근원으로 봅니다. 깔루 린포체는 마음의 본성을 “비어 있으면서도 밝고, 한순간도 쉬지 않고 알아차리는 성품”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본성은 어떤 형태도 없지만 모든 것을 비춰낼 수 있는 광명성과 공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본성은 억지로 만들어내거나 닦아서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즉, 깨달음이란 새로운 경지를 얻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자리에 돌아가는 일입니다.


세 전통 모두 본성이 본래 맑고 고요하며, 누구나 이미 갖추고 있다는 믿음을 공유합니다. 언어와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근원은 하나이고, 본성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는 통찰에서 출발합니다.


2. 수행의 방식 — ‘생활 속 수행’, ‘끊어지지 않는 깨어있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쉬기’


원불교의 수행은 매우 실용적입니다. 일원상을 바라보며 그 자리를 기억하는 것이 수행이지만, 그 수행은 좌선이나 조용한 명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상대할 때, 일을 할 때, 갈등이 생길 때, 그 순간에 드러나는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분별심을 줄이는 것이 곧 수행입니다. 즉, 원불교는 ‘생활 속 수행’을 강조합니다. 경계 속에서 마음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이 원불교 수행의 핵심입니다.


무시선은 이 수행을 한 걸음 더 밀어붙입니다. 앉아 있을 때만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할 때, 걷는 순간, 바쁜 일상 속에서도 “지금의 마음을 아는 것”을 끊어지지 않게 지속하는 것이 무시선입니다. 생각을 억누르거나 특별한 집중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위 전체가 바로 수행이 되는 방식입니다. ‘지성(至誠)의 끊어짐 없음’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일상 전체가 곧 선(禪)이 되는 삶의 방식입니다.


마하무드라는 수행의 방향이 매우 심플합니다. “있는 그대로 두고 쉬라(Leave it as it is)”는 말로 요약됩니다. 억지로 마음을 고치려 하지 않고, 생각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가라앉히려 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알아차림의 자리에 머물며, 떠오른 생각·감정·감각을 있는 그대로 흘러가도록 두는 것을 핵심으로 삼습니다. 이 방식은 매우 부드러우면서도 직관적입니다. 조작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억누르지도 않으며, 그저 본성 위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수행은 방향이 다르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원불교는 ‘삶 안에서 자성의 자리를 잃지 않는 것’, 무시선은 ‘끊어지지 않는 깨어 있음’, 마하무드라는 ‘순수한 알아차림 안에서 쉬는 것’을 강조합니다. 모두 마음의 본성을 잊지 않는 수행입니다.


3. 자아와 분별에 대한 이해


원불교는 자아를 업식과 습관에 의해 만들어진 가성적 존재라고 봅니다. 분별심이 일어날 때 마음이 흐려지고 본성의 자리를 잃는다고 설명합니다. 수행은 이 분별을 줄이고 자성으로 돌아오는 과정입니다.


마하무드라는 자아를 “생각들이 만들어낸 임시적 구성물”로 봅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실체라고 믿으면 괴로움이 생기고, 실체가 없음을 보면 자연스럽게 집착이 사라집니다. 결국 자아의 비실체성을 확인하는 것이 자유의 시작입니다.


무시선 역시 분별에 매이지 않는 삶을 강조합니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의 분별이 줄어들수록 자성의 작용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결국 세 전통은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때 본성이 드러난다고 가르칩니다.


4. 궁극의 목표 — 본성으로 돌아오는 자유


원불교의 목적은 자성회복입니다. 본래 밝고 고요한 마음의 자리를 다시 회복하여 지혜와 자비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삶을 말합니다. 마하무드라의 목표는 본성의 직접적 인식이며, 그 본성 위에 머물러 모든 경험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무시선은 삶의 어느 순간에도 본성을 잃지 않는 ‘항상 깨어 있는 삶’이 목표입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목표는 하나입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자유롭게 사는 것.



마무리 요약


일원상법어는 본성의 전체성을 밝히고,

무시선은 그 본성을 삶 속에서 끊어짐 없이 이어가는 방법을 제시하며,

마하무드라는 그 본성을 직접 보고 그대로 쉬는 방법을 가르친다.


세 전통은 서로 다른 길처럼 보이지만, 결국 한 중심으로 수렴합니다.

그 중심은 바로 본래 밝고 고요한 마음의 자리,

그리고 그 자리에서 시작되는 자유로운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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