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꾼달리니 각성과 마하무드라

_ 에너지의 길과 마음의 길이 만나는 자리

by 은종




요가의 깊은 수행과 티베트불교의 마하무드라는

서로 분리된 두 세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 안에 감추어진 근원의 에너지와 본성을 밝히려는

두 갈래의 길입니다.


하나는 **에너지(Shakti)**의 각성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의 본성(Mind’s Nature)**을 직접 인식하는 길이지만,

둘이 가리키는 중심은 동일합니다.


에너지와 마음은 원래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근원에서 서로에게 비추는 두 면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는 요가의 꾼달리니와 마하무드라를

은종님의 수행적 관점에 맞추어

깊고 조용한 흐름으로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1. 꾼달리니 — 생명 에너지가 깨어나는 길


요가에서 꾼달리니는

인간에게 원래부터 잠재된 근원적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뱀처럼 말려 쉬고 있는 이 에너지는

수행을 통해 천천히 깨어나

차크라를 통과하며 상향(上向) 운동을 시작한다고 설명됩니다.


꾼달리니 수행의 중심에는

아사나, 호흡법, 만트라, 무드라, 반다, 명상 등이 있으며,

이 모든 실천은 신체의 에너지 통로인 나디를 정화하여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흐르게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특히 **쁘라나(prāṇa)**는

꾼달리니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생명력입니다.

쁘라나가 막히면 마음이 흐리고 무겁고 산만해지며,

쁘라나가 열리면 마음은 밝고 집중적이며 고요해집니다.

그래서 요가는 먼저 몸과 호흡을 단련해

쁘라나를 충분히 흐르게 하고,

그 다음 마음을 관찰하고 다스리는 구조로 움직입니다.


이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반다(bandha)**입니다.

반다는 신체 내부의 에너지 잠금·해제를 통해

쁘라나가 중심축을 따라 상승하도록 조절하는 기술입니다.

몰라 반다(뿌리 잠금), 웃디야나 반다(배 잠금), 잘란다라 반다(목 잠금)는

요가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반다로,

꾼달리니 각성 과정의 핵심 역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꾼달리니가 깨어날 때, 수행자는

집중력·직관력·감수성·생명력·지혜 등이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삶 전체의 에너지 구조가 바뀌며,

가장 깊은 의식 세계로 점진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결국 꾼달리니는

몸의 에너지를 정화하고, 그 에너지가 의식을 확장시키는 길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마하무드라 — 마음의 본성을 직접 보는 길


마하무드라는 요가처럼 에너지를 다루지 않습니다.

몸을 열고 쁘라나를 조절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직 마음의 본성을 직접 보고 쉬는 길입니다.


깔루 린포체는 마음의 본성을

“비어 있으면서도 밝고 알아차리는 성품”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본성은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고

수행을 통해 새롭게 얻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나 존재하지만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 자리입니다.


마하무드라는 이 본성을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알아차리는 것을 목표로 하며,

수행의 핵심은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있는 그대로 두고, 그대로 쉬십시오.”


생각을 억누르지 않고

감정을 조작하지 않으며

조용히 본성 위에 머무르는 방식입니다.


마하무드라는 노력으로 집중하거나

특별한 상태에 들어가려는 방식이 아닙니다.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든

그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그 배경의 고요한 자리에 머무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 수행이 깊어지면

‘생각하는 나’라는 느낌이 느슨해지고,

자아의 경계가 흐려지며,

모든 경험이 하나의 동일한 알아차림 안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 마하무드라는

마음의 본성을 직접 보는 지혜의 길입니다.



3. 두 수행의 근본적인 차이


꾼달리니와 마하무드라는

출발점부터 과정·기술·사용 언어까지 완전히 다릅니다.


꾼달리니는 에너지 중심

• 몸과 호흡, 나디와 쁘라나의 정화

• 반다·무드라·만트라 등을 통한 에너지 상승

• 생명력이 강해지면서 마음이 밝아지고 집중됨

• ‘상승과 확장’의 체험을 중시


마하무드라는 마음 중심

• 생각과 감정이 흘러가는 방식 그대로 관찰

• 조작 없이 자연스럽게 ‘쉬기’

• 본성을 직접 보며, 그 자리에서 자유를 얻음

• ‘발견과 귀환’의 체험을 중시


즉, 꾼달리니는 에너지에서 마음으로,

마하무드라는 마음에서 에너지로 흘러가는 길입니다.



4. 그러나 깊이 들어가면 둘은 서로를 향해 움직인다


흥미로운 것은,

두 전통의 수행자들이 깊어질수록

서로 반대편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꾼달리니가 깨어나면

• 쁘라나가 강해지고

• 나디가 정화되며

• 의식은 밝아지고

• 마음은 더 쉽게 고요해짐


이 상태에서는

마하무드라의 ‘그대로 알아차리기’가 훨씬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요가 스승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에너지가 흐르면 마음은 투명해진다.”


마하무드라가 깊어지면

• 생각이 잦아들고

• 조작 없는 고요가 드러나며

• 자연스럽게 쁘라나가 일어나고

• 나디의 막힘이 부드럽게 풀립니다.


티베트불교에서는

“본성을 보면 에너지는 자동으로 조화된다”고 말합니다.


결국 두 길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같은 근원으로 흐르는 두 강입니다.



5. 수행의 목적은 동일하다 —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자유


두 수행의 최종 목적은 같습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자유롭게 사는 것.


꾼달리니는

에너지의 정화와 상승을 통해

마음을 본래 자리로 이끌고,


마하무드라는

마음의 본성을 직접 드러내어

에너지와 삶 전체를 조화롭게 만듭니다.



은종님을 위한 최종 요약


꾼달리니는 몸과 에너지에서 마음으로 흐르는 길,

마하무드라는 마음에서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두 길은 서로를 향해 만나고, 결국 하나의 근원적 자유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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