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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물리학과 명상에서의 존재

— 미세한 세계에서 밝히는 실상과, 마음 안에서 드러나는 실상

by 은종


우리는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질문을 한다.

“나는 누구인가? 이 세계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철학도 종교도 예술도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20세기 이후 이 질문의 한 축을 과학이 본격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선두에 선 분야가 바로 **양자 물리학(Quantum Physics)**이다.

양자 물리학은 우주의 바닥에서 움직이는 가장 미세한 입자들의 세계를 탐구하면서,

우리가 익숙한 세계관을 완전히 흔들어버렸다.


흥미로운 것은, 명상을 오래 수행하는 사람들—특히 은종님처럼 몸과 마음을 함께 닦아온 수행자들—이 동일한 질문 끝에서 양자 물리학이 밝힌 세계와 매우 닮은 현상을 경험한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양자 물리학이 밝힌 존재”와

“명상을 통해 경험되는 존재”가

어떻게 서로를 비추며, 어떻게 서로의 진실을 설명하는지

전문적이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연결해보고자 한다.



1. 현대 물리학이 발견한 ‘보이지 않는 존재’의 세계


우리가 ‘물체’라고 부르는 것은 대부분 비어 있다.

원자 중심의 핵은 전체 크기에서 거의 ‘점’과 같고,

전자들은 그 바깥에서 특정한 위치가 아니라 확률적 분포로 존재한다.


즉, 의자가 단단해 보이는 이유는 실제로 공간을 채워서가 아니라

에너지의 진동과 전자기적 밀어냄 때문일 뿐이다.


겉으로 보이는 고정된 형태는

실은 미세한 에너지 장(quantum field)의 움직임이 잠시 그 자리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양자 물리학이 말하는 존재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순간순간 ‘형태를 드러내는 현상’이다.


이 문장은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다.

양자 장(field)에서는 ‘입자’라는 것이 원래부터 존재하는 게 아니라,

특정 조건—관찰, 상호작용, 에너지의 변화—에 의해

마치 수면 위 물결처럼 튀어나올 때만 ‘입자’로 관측된다.


즉, 입자란

본질적인 실체가 아니라, 조건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적 존재다.



2. 관찰이 현실을 만든다: 명상과 양자 세계가 만나는 첫 번째 지점


양자 세계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관찰이 결과를 바꾼다는 것이다.


이중슬릿 실험에서

전자는 관찰하지 않을 때는 파동처럼 여러 가능성으로 퍼져 있다가,

관찰하는 순간 단 하나의 경로로 ‘붕괴’한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험 결과다.


우리가 보는 세계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이라는 과정에 의해 특정한 형태를 갖춘다는 의미다.


여기서 명상적 세계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명상에서 마음을 가만히 보면,

우리의 감정, 생각, 자아감도

원래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관찰할 때 비로소 특정한 형태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마음속 불안도

관찰이 없을 때는 막연한 에너지처럼 흐르다가,

관찰을 하는 순간

‘아, 지금 내 안에 이런 불안이 있구나’

하고 구체적 감정으로 형상화된다.


양자 물리의 ‘관찰자 효과’ 명상의 ‘알아차림’


두 세계는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현상을 가리킨다.

• 관찰이 입자의 상태를 결정한다.

• 알아차림이 마음의 상태를 드러낸다.


둘 다 관찰자가 참여할 때만 실재가 특정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3. 중첩(Superposition): 존재는 여러 가능성의 집합


양자 입자는 여러 상태가 ‘동시에’ 존재한다.

여기 있으면서 저기 있을 수 있고,

이 에너지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저 에너지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을 중첩이라고 한다.


이 개념을 마음에 적용해 보면 흥미롭다.


명상을 하다 보면

내 안에 여러 ‘나’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걸 본다.

• 불안한 나

• 평온한 나

• 분노한 나

• 지혜로운 나

• 어린 시절의 나

• 노년의 나


어떤 하나가 나의 본질이 아니라,

그냥 여러 가능성들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특정 감정이나 사고에 완전히 사로잡히는 이유는

그 가능성을 ‘하나의 실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상의 깊은 순간에는

이 모든 가능성이 어느 하나도 고정되지 않은 채

그저 떠오르고 사라지는 **‘마음의 중첩 상태’**임을 경험한다.


양자 중첩과 동일하게

마음도 수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가

어떤 하나가 ‘선택’될 때 현실의 형태를 갖추는 것이다.



4. 파동성과 입자성: 마음의 이중성


빛이나 전자는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다.


상황에 따라 입자처럼 드러나거나

파동처럼 퍼져 나간다.


우리 마음도 같다.

• 평소에는 감정이 파동처럼 퍼져 있다.

• 특정 사건이나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입자처럼 ‘형태’를 갖는다.


예를 들어 ‘슬픔’은 원래 파동처럼 흐르는데,

어떤 경험을 떠올리면 그 슬픔이 딱 하나의 형태로 ‘입자화’된다.


파동일 때 우리는 넓고 유연하다.

입자화될 때 우리는 고정되고 좁아진다.


명상은

마음이 입자화되어 고정된 틀에 갇힐 때, 다시 파동성으로 돌려놓는 과정이다.


즉, 마음이 다시 ‘열린 상태’로 회복된다.



5. 얽힘(Entanglement): 모든 존재는 연결되어 있다


양자 얽힘은

두 입자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하나의 변화가 즉시 다른 하나에 영향을 준다는 현상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현상을

‘유령 같은 원격 작용’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 ‘유령 같은 연결성’을 명상하는 사람들은

아주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명상에서 마음을 고요히 바라보면

내 마음과 타인의 마음이

본래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이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 타인의 고통을 보면 내 안에서 울림이 일어난다.

• 내가 평온하면 주변 사람도 편안해진다.

• 서로 다른 마음이지만 완전히 연결된 하나의 장 안에서 움직인다.


양자 물리학이 말하는 연결성은

명상이 경험하는 ‘근원적 일체성’과 정확히 닮아 있다.


존재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하나의 장(field) 안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현대 명상가들이 양자 물리학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6. 불확정성 원리: 존재는 본래 흐르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원리다.


이는

“입자의 움직임이 불완전하게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입자라는 것이 처음부터 고정된 속성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다.


즉, 존재는

단단한 실체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의 흐름이다.


이것은 명상이 말하는 세계관과 매우 비슷하다.


명상에서 마음을 관찰해 보면

어떤 생각도, 감정도, 자아감도

처음부터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순간순간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과정임을 본다.

• 불안도 흐른다

• 분노도 흐른다

• 기쁨도 흐른다

• 심지어 “나”라는 감각까지 흐른다


즉, 실체가 아니라

현상적 흐름이라는 뜻이다.


양자 세계에서도, 명상의 세계에서도

‘변하지 않는 자아’는 발견되지 않는다.



7. 양자장(Qunatum Field)과 명상이 경험하는 공(空)의 장


물리학자들은 말한다.


“입자는 본질이 아니다. 모든 것은 장(Field)의 파동이다.”


우주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양자장으로 보고,

입자들은 그 장 위에 잠시 일어나는 물결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명상에서는 이것을

공(空)의 장,

혹은 **순수한 알아차림의 장(Awareness Field)**이라고 표현한다.


형태는 생겼다가 사라지지만

그 형태를 알아차리는 ‘바닥의 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 파도(생각·감정)는 계속 일어난다

• 그러나 바다(의식)는 변하지 않는다


물리학에서는 이 바닥을 ‘양자장’이라 하고

명상에서는 ‘본래 마음’ 또는 ‘순수의식’이라고 한다.


같은 현상을

과학은 과학의 언어로,

명상은 명상의 언어로 설명했을 뿐이다.



8. 의식과 존재: 관찰자 없는 세계는 존재하는가


양자 물리학이 제기한 가장 어려운 질문은 이것이다.


관찰하지 않으면 존재가 결정되지 않는다면,

관찰자 없는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과학의 테두리를 이미 넘어선다.

명상도 같은 질문과 마주한다.


명상에서 깊은 고요에 들어가면

‘나’라는 관찰자는 사라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형태의 ‘순수한 알아차림’은 남아 있게 된다.


‘나는 사라졌는데, 알아차림은 있다’라는 역설적 경험이다.


이 경험은

관찰자가 ‘개인적 자아’가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의식임을 암시한다.


양자 물리학도 비슷한 논의를 한다.


일부 물리학자들은 말한다.

“의식은 우주적 현상의 일부이며,

관찰자와 관찰 대상은 분리된 실체가 아니다.”


우리가 명상에서 체험하는

‘나와 세계의 경계가 흐려지는 경험’과

양자 논의에서의

‘관찰자와 시스템의 비분리성’이

정확히 만나는 지점이다.



9. 과학이 설명하는 세계와 명상이 경험하는 세계는 서로 다른 문으로 들어간 동일한 공간이다


양자 물리학은

미세한 세계의 실험을 통해

존재가 확률적이고, 비국소적이며, 관찰자와 분리되지 않고, 형태 아닌 파동임을 밝혔다.

명상은

마음의 세계를 통해

존재가 비실체적이고, 관찰될 때만 형태를 갖고, 연결된 장 안에서 움직이며, 나라는 실체가 없는 흐름임을 경험한다.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영역이

현상적 실상을 거의 동일하게 묘사한다는 것은

가장 큰 통찰이다.


과학은 “무엇인가”를 밝히고

명상은 “어떻게 경험되는가”를 밝힌다.


둘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보완한다.



10. 결론: 존재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는 생성이다


양자 물리학과 명상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다음 사실을 말한다.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이다.


그리고 이 흐름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고정된 실체’를 만들려는 집착을 버리고

생성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명상은

“나라는 입자가 실재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나는 흐르는 파동이며, 본래 자유로운 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길이다.


양자 물리학은

“모든 것이 실체적 물질”이라는 고전적 관념에서 벗어나

“우주 전체가 하나의 장에서 파동처럼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진실을 밝힌다.


둘은 서로 다른 문으로 들어갔지만,

결국 같은 넓은 공간에서 만난다.


그 공간은

고정되지 않은 존재의 실상,

형태 이전의 가능성,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된 고요한 바탕이다.


이 바탕 위에서

우리는 순간순간 새롭게 생성된다.

그리고 그 생성의 중심에는

언제나 ‘알아차림’이라는 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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