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쪘습니다. 도로 결빙이 잦은 겨울날, 외출하려던 중에 아파트 입구의 비탈진 면을 내려가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통증은 둘째 치고, 창피한 생각에 화들짝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아차 싶었죠. 오래전부터 처방 치료 중인 고관절 부위의 골다공 증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죠. 뼈가 약한 고령자에게 고관절의 골절은 속절없이 사망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질환 중 하나입니다(사망이 아닐지라도 수술 후유증으로 신체불편을 동반합니다).
젊은 나이라면 훌훌 털고 일어났을 그 일은 이틀간의 통증으로 이어졌고요, 다행히 타박상에 그쳐 집에서 간단한 처치로 통증을 가라앉힐 수 있었습니다. 재발방지책으로 비교적 안전한 지하주차장과 외부로 연결된 통로를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외부와 연결된 구조가 원만한 경사로 이어졌고 결빙될 일 없는 내부바닥에서 미끄러질 일도 발생하지 않을 테니까요.
혹여 골절을 입었다면 장애로 이어졌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함께, 죽음에 대해 재조명하게 되었지요. 죽음이 머지않은 나이에 이르렀지만, 뜻하지 않은 사고로 준비하지 못한 죽음만은 당하고 싶지 않아서였죠.
홀로 살고 있는 나는 ‘예측 가능한 평온한 죽음’을 원합니다. 예전엔 잘 모르고 ‘사고사’ 아닌 ‘자연사’라고 응대했었죠. 동물세계에서 다른 동물로부터 잡아먹히는 것이 ‘자연사’라 함을 알기 전까지 말입니다(늙어 사망한다는 건 오로지 인간만이 누릴 축복). 사망 시점이 예측 가능하다는 것은, 숨을 거둘 때까지 자신의 죽음에 적극적으로 간여할 수 있다는 의미가 함축돼 있습니다.
‘예측된 죽음’은 죽기 전에 자신의 죽음을 정리할 수 있는 장점과 아울러 또한 다음과 같은 상황 전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무엇보다 미약해지는 말기에 이르도록 신체활동의 독립성이 유지된다는 점이 있습니다.
두 번째, 임종하기 전까지 언어소통이 가능한 또렷한 의식을 지닌다는 점이 있습니다.
세 번째 혼수상태에 이른 이후에도 오래지 않아 영면에 들게 됩니다.
이런 점들이 내게 부각돼 다가왔습니다. 폐암으로 고인이 된 어머니가 마지막 6개월간의 생존선고를 받아 병상에서 치룬 병력도 이와 같았습니다. 혼수에 이르기 전까지 대화가 유지되었고, 흔한 욕창도 발생한 적이 없었으며, 성인용 패드 착용도 없었지요. 병동에서 우리가 할 수 있던 일은 어머니 곁을 지키는 일뿐. 의료진이 제때 방문하는 순회 진료 외에 자식들의 돌봄 손길은 부끄러울 정도로 허전했습니다.
되돌아보니 오히려 자식들을 배려한 어머니의 병력이었다는 생각마저 들게 하더군요. 그처럼 간결하고 깨끗한 죽음을 우리에게 선물로 안기고 가셨다니. 어느새 당시 어머니 나이에 근접한 지금의 나를 되돌아보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돌봄을 기댈 가족이 여의치 않은 내게 이 같은 죽음을 선호하지 않을 까닭이 있을까요.
혼자 살아가는 사람에게 권유하는 말이 있습니다. 돌봄이 요구될 시간의 도래가 두려워진다면 미리 ‘친구부자’를 만들어 놓으라고. 맞는 말이긴 한데 쉬운 일은 아닙니다. 늙은 나이에 이르기까지 곁에 남는 진정한 친구가 한두 명이라도 있다면 그는 이미 부자일 것입니다.
삶의 등식이 뚜렷해지는 노년에는 생활 구도가 서로 달라 멀어지는 일이 허다합니다. 바깥활동도 줄어드는 노년기에는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 유아적 언어에 갇히게 되고, 그로써 대화의 질도 빈약해질 수밖에 없어요. 나눌 말이 별로 없는 생활 속 진공상태가 되는 것이죠.
변화를 동반한 지속적인 경주만이 이런 관계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젊은 친구들도 그에 호응한다면 그들의 곁을 내어주지 않을까요. 또한 지속적으로 교류하는 동년배 친구가 노후에 몇몇 있다고 칩시다. 그런다 한들 같이 늙어가는 몸으로서 서로의 돌봄에 간여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지요. 그래서 20년 아래의 젊은 친구를 사귀라는 권유까지 나오게 된 것 같습니다.
태어날 때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탄생한 목숨이지만, 죽음에 임하는 방식만은 내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겠지요. 즉 내가 아닌 제3자에게 맡기는 죽음이 아니라, 자기주도의 면밀한 결정 하에 죽음을 맞는 시대로 가야 함이 옳습니다. 안락사 또는 존엄사, 노쇠로 맞이하는 편안한 죽음, 길지 않는 병사, 사고사 등등. 죽음에 이르는 전 과정에는 한 사람의 생이 복잡하고 미묘하게 녹아들어 있습니다.
나이 고하와 상관없이 일어날 죽음이, 때론 두렵기도 하고 아직은 먼일로 느껴질 수 있다고 해서 외면할 일도 아니라는 겁니다. 죽음을 늘 염두에 둔 사람은 남은 날을 잘 살아가게 되어 있거든요.
바꿔 말하면 잘 살아낸 사람만이 잘 죽을 수 있다는 이치와 같습니다. 오히려 죽음으로 남겨질 시간이 유한해서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지요. 예측 가능한 죽음을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그 발원대로 실현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다만 그에 닿을 때까지 내 죽음의 결을 연마해 갈 도리밖에 없겠지요. 죽는 날까지 잘 살아가려는 의지와 실천행동 이야말로 평온한 죽음을 보장받는 최상의 보루가 될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누구나 혼자인 시대로 성큼 진입했습니다. 2030년에는 4가구 중 한 가구가 1인 가구가 될 거란 통계가 나왔으니까요. 가정을 이루었다 해도 단출해진 가족 구성 아래에서는 훗날 누구나 홀로될 확률이 높아진 겁니다. 게다가 누구인들 홀로 죽음을 맞을 수 있다는 가정이 현실화 되었고요. 이 같은 죽음 방식을 늙은 사람에게만 적용하려는 시도는 이젠 먹혀들지 않겠지요. 죽음이란 주제가 열린 공론의 장에서 누구든 어느 장소이든, 무겁지 않아 자유롭게 오가는 담론으로 활짝 피어오르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