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노후재정의 재발견

by 정미영

풍요로운 수확의 계절에 웬 보릿고개란 말인가요. 청명한 하늘이 무색토록 노후재정에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해를 거듭하며 전자제품을 교체할 시기가 도래해, 올봄부터 예기치 않던 목돈지출이 발생한 탓입니다. 궁핍의 시절을 거친 우리 늙은 세대는 검소와 절약이 껌딱지처럼 몸에 달라붙은 사람들입니다.

사용 중인 생활용품은 웬만해서 새것으로 바꾸지 않고, 고물 형색에도 새 숨을 불러일으켜 보물로 재탄생시키는 생명사상의 선도자였습니다. 그렇게 집집마다 전수받은 생활자원의 보물단지가 여럿 있었던 겁니다. 그래왔던 세상의 판도가 여러 번 뒤집혔음에도 오래 밴 허울을 벗지 못할 거라 여겼는데, 이번 한 방에 보란 듯이 흔들렸던 것이죠.

그 같은 지출이 노년에 돌출될 거란 상황을 중년에는 예측할 수 없었어요. 살아 뒷북칠 일들이 삶의 여정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세상이 아닙니까. 40대 중반부터 노후를 위해 국민연금의 출범 시기와 걸맞게 충분하지 않으나, 사적연금과 비상금도 함께 준비해 왔습니다. 30대부터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일반론이 강세이지만 개념조차 정착되지 않던 그때 그런대로 앞선 행보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노년의 재정은 당연한 말이지만 노인의 정신과 육체의 자립을 포괄하는 기본 생활자금을 말합니다.


먹고살 것과, 몸이 아파 들어갈 비용만 준비하면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늙어가는 길목에서 느닷없이 전개될 일들을 누구인들 예측이 가능하겠어요. 그 실체의 으뜸은 나날이 지능이 발전해가는 전자제품에 있습니다. 무서운 속도로 우리의 생활을 침투해오는 전자제품의 출시가 이젠 두렵기조차 합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생활에서 몸이라도 편해지고픈 욕구의 시선들이 더 편리기기들로 쏠리고 있거든요.

쉴 집이라고 하나 많은 공간을 차지한 제품들에 둘러싸여 실제 거주자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받지 않을까요. 어느새 우리들은 기기에게 예속돼 노예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요, 그것들마저 노쇠해 주기마다 교체할 시기가 도래해 만만치 않은 비용을 동반한다는 사실입니다. 긴 수명을 자랑해왔던 예전 전자제품의 세력은 옛 시대물로서 박제되었고요. 근래 들어 제조사가 제품의 수명을 예전보다 짧게 만들어 놓았다는 서글픈 현실이 노후재정에 압박을 주고 있습니다.

20년 가까이 사용해 온 몇몇 가구와 전자제품들이 이제 고사 직전에 놓였어요. 안 좋은 일은 겹쳐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결국 수명이 다해가는 제품 몇 가지를 줄지어 교체하게 되었지요. 이번 새 제품 교체로 향후 5년에서 길게는 10년 뒤를 또 염려하게 될 일들이 따랐습니다(그때까지 살아있다면). 향후 지금보다 더 늙어 열악한 환경과 건강에 놓이더라도 감당할만한 경제적 대응력이 이어지길 염원할 뿐입니다. 그러면서 감당이 안 될 때의 대안으로 새 제품의 구입 대신 중고품으로 대체하기로 다짐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토로할 일이 있습니다. 내 재정에 부담을 안겨 과욕을 부린 일입니다. 30년 된 침대와 10년을 넘겨 쿠션이 꺼져버린 면 소재의 소파를 교체했던 겁니다. 그간 검소하게 살아온 내게 포상의 수순에서 딱 눈 감고 사치를 부려봤습니다. 내 생애 마지막 구매일 듯싶었던 그 결정에 머리를 조아리진 않았어요. 과분하나 신체적 장애가 뒤따를 머잖은 장래를 위해 기능이 첨가된 가구를 선택했을 뿐입니다. 온당한 결정이라 생각해 후회하지 않습니다만, 긴긴 초겨울까지 허리띠를 졸라맬 금전 상황은 부담으로 안겼습니다.

때마침 몸담은 공동체에서 ‘소비멈춤’운동이 개시되었습니다. 내가 처한 실정에 맞춤형일 것 같아서 참여한 그 행사가 위안이 된 일입니다. 최소한의 생활비로 이 고비를 넘기고자 주변을 최적화시켰으니까요. 지출 항목의 최전선은 목숨을 지탱해 줄 먹을거리에 두었고 웬만한 지출에는 눈감기로 했습니다. 냉장고에 알게 모르게 재워둔 재료만으로도 소박한 밥상이 차려지면 족하다 여겼습니다. 그로써 속을 덜 채워 건강에도 유익할 테니까요. 또한 냉동고를 비울 좋은 기회가 맞닿아 있는 ‘지금’과 헐렁해진 냉장 칸으로 인해 전기요금까지 ‘절약’된다는 점은 꿀팁으로 선회하지 않을까요.

2023년도 기사로 기억되는데요, 젊은이들의 절약캠페인이 있었습니다. 하루에 돈을 사용하지 않는 날을 기록해 공유하는 챌린지였지요. 외식은 물론 음식택배도 없애고, 귀찮아도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자린고비에 나선 그들의 행동에 되레 자극받아 고무되기에 충분한 이 늙은이랍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죽음의 질 가꿀 적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