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시대에 ‘절친’이라 여길 분이 있으십니까. 생각의 코드가 맞고 가치관도 같아서 대화하기에 참 편한 사람. 게다가 정서적 문화가 덤으로 이어진다면 금상첨화겠죠. 특별한 관계란 서로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가 마음에 견고하게 깔린 인지상정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 상대로부터 설령 어긋난 말을 듣게 되더라도, 그럴만한 사유가 있으리란 짐작을 낼 수 있는 속 깊은 마음상태인 거죠. 서로의 인격을 믿기에 의외의 낯선 ‘말’에 일절 반응하지 않고, 차가운 뇌에 맡겨 ‘숙성’시간을 거치라는 겁니다. 즉각적인 반응으로 처리하기 이전에 상대 말의 결부터 잘 살펴보라는 의미인거죠.
그것이 ‘신뢰하는 자’에 대한 예의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명상 실전을 통해 알게 된 부분인데요. 몸 안의 기운을 드러낸 것이 소리를 타고 공기에 실려 상대방의 귀에 도달하기까지 전 과정이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그 소리는 개개인의 기운에 따라 맑거나 탁해지는가 하면, 말의 속도도 느려지거나 빨라짐에 따라 말의 해석은 천차만별로 갈리기 쉽습니다. 그러니 본래의 뜻과 다르게 왜곡되어 버리는 말의 양면성에, 나 자신도 빠지게 될 날을 맞을 수 있음에 유의하세요.
20년 넘은 지인이 있습니다. ‘절친’이라 믿었습니다만 그 일이 있은 후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인터넷 동호인으로 만나 대화가 잘 통해 친동생 같은 감성으로 번져갔습니다. 남편의 사업실패로 가세가 기운 그녀지만, 매사 긍정적이고 밝은 모습을 잃지 않았어요. 경제 일선에 나서게 한 남편을 향한 원망의 눈빛도 없었습니다. 그녀 일터에서조차 주인 된 마음으로 임하는 모습을 보면 존경심마저 일었지요.
그런 그녀가 올해 환갑을 맞았는데 경제활동을 멈출 수 없는 처지이고요, 열악한 환경 아래서 최저임금에 준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빡센 육체노동의 일선에서 그녀가 어찌 버틸 수 있을까 걱정스럽다 못해 애틋한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쉴 날마저 젖히면서 일감 채우기에 급급한 그녀는 노동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런 그녀가 내게 단 한 번도 힘들다는 원초적인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더군요. 그러면서 처음으로 그녀에 대해 의구심을 지니게 됐지요. 휴식을 취하면 되레 불안감이 증폭될까 두려워 고질적인 노동에 매달리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으로. 그녀의 일은 길어졌고 잠깐 짬을 낸 만남이 신속하게 치러졌습니다. 이런 의례적 만남의 연속은 관계를 영글게 하는 복심으로 자리 잡기 어려울뿐더러 어떤 힘의 작용도 실리기 않음은 빤합니다. 긴 물리적 시간대의 만남이 성글게 엮인 과정에서도 ‘절친’이란 착시현상을 만들어가지 않았을까요. 되돌아보니 그런 점에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절친’의 감성을 대동하고 나갔습니다, 그녀의 고된 일상 위에 자연스럽게 얹힌 내 한 마디가 불씨로 화해 뜨겁게 달아오른 사건이었습니다. 누구라도 그 정도는 건넬 말이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반격은 의외였죠. 당혹스러워서 상황을 해명하려고 빠른 말로 질주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쳤습니다. 상대가 ‘절친’이라면 서둘러 불 끄려는 듯한 해명이 필요치 않은 관계를 말하는 것이니까요.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구차한 언급을 거두었습니다.
이후 서로에게 어색한 기류가 형성되었죠. 아마도 ‘절친’이란 틀 속에 서로 다른 채색을 입힌 까닭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치게 됐습니다. ‘절친’이란 실체는 원래 없던 것이고 착각이었습니다. 그녀에게 품었던 ‘절친’의 의미에서 멀찍이 물러나니, 한결 마음 가벼워지더군요. 돌아보면 나 자신만큼 나를 제대로 이해할 사람이 외부에 존재할까요. ‘절친’을 만들어가는 것 또한 누군가에게 기대려는 약한 마음일진대 이처럼 허망한 일은 또 없습니다.
이제 그 같은 ‘절친’의 대상으로부터 홀가분해지기로 했습니다. 어떤 일에서든 꺾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를 구축한 지금이니까요. 이렇듯, 본래 내 뜻과 다르게 왜곡된 공간에서 질식할 것만 같은 순간에 발 딛게 되는 일이 때로 생깁니다. 언어적 표현이 실제 모습을 온전하게 담아낼 수 없다는 사실이 이럴 때면 너무나 명명백백해지고요.
살면서 일정한 사람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는 것만큼 어려운 과제가 또 있을까요. 이 늙은이도 자신할 부분이 아닙니다. 온 세상을 돌아보면 별일 아닌 일로 싱겁기 짝이 없는 상황에 내몰린 적이 없지 않나요, 그녀에게 빙의돼 보기로 했습니다. 그때 결정적인 한 방이 보호색을 띤 카멜레온처럼 과도하게 튕겨 나왔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내봤습니다. 누구나 바쁜 일과에 쫓기다 보면 그 결과로 미세한 감정이 간과되는 누를 낳게 되지요.
생각 자체도 당장 앞에 펼쳐진 일에 매몰되다 보면 단세포적 판단을 내릴 경우도 다반사일 테고요. 덧붙여 대충 알게 된 단서 하나를 확증편향으로 몰고 가 오판하는 일까지. 왜곡된 생각이 끼어들 틈을 내주지 않기 위해서는 여유로운 시간을 유지하는 게 보다 중요할 것입니다. 균형 있는 삶이 되도록 탄력을 실어줄 테니까요.
이제 ‘나’ 자신부터 지금 건네려는 말이 상대에게 과연 합당한 일인가를 알아차리려 합니다. 옳은 말일지라도 적재적소가 아니라면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라는 거죠. 건넬 말에도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무릎을 칠 만큼 맞아떨어지는 말이었습니다. 관계 형성에서 파생된 상실에 저항 없이 무디어질 나이에 이른 것 같습니다. 죽을 때까지, 임할 마음공부는 이렇게 끝이 없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