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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면부지의 이웃에게 불쑥 내민 선물

by 정미영

아닌 밤중에 웬 소리일까. 깊고 깊은 밤, 귓가에서 맴돌다 멈추길 반복하는 울음소리에 잠을 깨어 짜증이 났으나 잠잠해지려니 했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어렴풋이 들려오는 건 분명 서럽게 우는 여자의 흐느낌 소리였어요. 이 무슨 기괴한 일인가. 안 되겠다 싶어 불을 켜니 새벽 3시를 가리키는 바늘이 조금 뒤처진 시간과 맞닥뜨렸습니다.

어디서 나는 소리이길래 단잠을 방해하려는 것이며 또 무슨 사연일까. 마치 현장을 수색하려는 기세로 일어났습니다. 베란다 문을 열어젖히며 굽어 내려다보았지요. 그런데 밖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어요. 방안을 찬찬히 돌아봤더니 화장실 옆 작은 방 벽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였지요. 우리 집 벽면과 밀착된 부분에서 배어 나온 울음소리란 단서 하나로도 옆집임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내 나는 짐작이 가는 그 측은지심에 마음이 진정되었습니다.


얼마 전, 벌어졌던 사건과 맞물려 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야단법석을 떠는 소리가 났습니다. 청소용역 여러 명이 3층인 우리 집 아래 길가에 럭스를 붓더니 그 위에 물로 뿌려대며 닦아내는 게 아닌가요. 왜 독한 럭스를 길에 쏟아붓는 건지 못마땅한 눈길로 바라봤습니다. 그 행위는 담날도 여전했습니다. 궁금해서 나가 물었죠. 그랬더니, “사모님 모르세요, 그저께 밤 옆집에 사는 남자분이 뛰어내려 자살했는데---”라고 하며 그 사건으로 바닥에 묻은 피를 씻겨내는 중이라는 겁니다.

섬뜩했죠. 바로 옆집에서 일어난 사고라니. 사고가 일어난 밤 10시 나는 이미 잠에 들어있었던 겁니다. 그 시각에 곤히 잠들어 바깥에서 벌어진 사건을 전혀 몰랐던 거예요. 게다가 사건 다음 날 새벽,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 현장 부근을 지나쳐서 고양이 사료까지 줬던 일을 생각했습니다. 사고 후 여러 날, 그 집에선 불빛이 새어 나오지 않았지요. 기혼의 딸이 홀로가 된 어머니를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갔다는 말만 들려왔죠. 고인은 회복되기 어려운 암에 걸렸고 우울증까지 겹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점 외에는 아는 게 별로 없었습니다.


이후 얼굴을 익힌 주민들과 마주칠 때마다 그 일로 수군대기 시작했습니다. 뚝 떨어진 위치의 고층에 사는 한 주민은 20층 꼭대기에서 떨어져 내린 소리가 너무 커서 내다볼 정도였다며 가까이서 본 것처럼 끔찍했던 장면에 대해 몸서리를 치는 게 아닌가요. 그러면서 지천에 있는 내게 어찌 듣지 못하고 잠들 수 있는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 수군거림 이면에는 남겨진 미망인의 안부보다 뒷방아 찧는 소비적 가십거리로 전락한 점이 포착될 뿐이었습니다. 제각각 자신들 일에 빠져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던가요. 남의 어려운 사정에 대해 세심한 관심을 품기란 쉽지 않은 요즘이고요. 뒤늦은 감이 있었지만 잠을 설치게 한 계기가 오히려 미망인과 접속할 기회로 다가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괜찮은 용기에는 주저함이 끼어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간 반려동물 산책으로 안면을 익힌 주민들이 몇몇 있었지만 더 이상의 의미로 확장되기는 손꼽을 정도에 그쳤지요. 그 기회로 아파트란 공동주택에 살면서 사막화 되어가는 관계형성에 대해 되돌아볼 계기가 되었던 겁니다.


심각한 질병은 남겨진 가족들의 삶을 단번에 흔들어 놓습니다. 자살한 그분 또한 그의 결단으로 끝을 장식했겠지만, 그의 곁을 돌본 반려자의 삶 또한 송두리째 부정된다는 현실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 겁니다. 남겨진 이가 이와 같은 상황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사망에 이를 만큼 복잡한 심경을 지닌 고인이라 해도 모든 상황을 뒤엎을 정도로 정당화시킬 수 없는 것이죠. 다만 그의 죽음 이면에는 반려자의 삶을 전혀 고려치 않는 전형적인 이기심이 발로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대목을 만나면 가슴이 시려옵니다. 있을법한 정도의 차이나 따른 상황을 거론할 일이 따로 있겠지만, 치유되지 않는 병에 걸렸다고 누구나 자살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되레 담담한 죽음을 준비하면서 가족들과의 마지막을 섬세한 사유의 시간으로 채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치료과정에서 과다한 경제적 부담도 따르겠지만, 가족들과 이룬 승화된 시간과 맞바꿀 만큼 금전적 압력 앞에 꿇어 자살로 마감하는 것이 과연 옳은 판단일까요.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그 집에 켜진 불을 보고 나서야 미망인이 집으로 돌아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리나케 가까운 꽃시장을 찾았습니다. 봄을 맞아 이미 피어오른 여러 색의 꽃과 나무들이 환호하듯 바라보는 이에게 미소를 짓게 해줬습니다. 식물 가꾸기에 관심이 많은 나는 미망인에게 어울리는 꽃을 고르고 있었지요. 선물로 어울릴 성싶은 풍성한 제라늄을 선뜻 구입했습니다. 제라늄은 사계절 내내 베란다에서 해마다 자라는 특성과 오래가는 꽃 감상으로 재미가 쏠쏠한 놈이거든요. 생면부지의 미망인을 생각하며 여러 색의 제라늄 중 가장 화사한 분홍색으로 택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지녔던 자기화분에 옮겨 담으니 더욱 빛을 발하는 게 아닌가요. 나는 흡족했지만 미망인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곁들여 예쁜 그림엽서에 정성어린 마음의 흔적을 남기고는 그 집 현관 앞에 몰래 놓고 돌아왔습니다. 외람된 내 글로 인해 행여 미망인에게 마음을 다치게 하지는 않을지. 이로써 내 작은 선물이 그녀에게 일으킬 용기를 북돋아 줄 바람과 내민 내 손이 부끄럽지 않은 결과이기를.


이 글을 마무리하는 중에 그 미망인으로부터 화답이 왔습니다. 초인종과 함께 현관 앞에 제과점 케이크와 함께 꽂힌 카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어요.

“---따뜻한 주민이 계심을, 또 위로와 응원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보내주신 화분은 물도 잘 주고 잘 키워보겠습니다.”

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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