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우주 한 조각’을 펼칩니다. 우주의 별 하나, 화보 밖으로 날아들어 내 앞에 떨어진 영험한 순간을 맞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짓궂게 건넵니다. 약지 않게 살아가는 일이 참 외롭고 어렵지 않냐고. 60억 킬로미터 거리로 우주 위에 떠 있는 보이저 1호가 지구를 조준해 찍은 사진과 절묘하게 떨어진 시점이었죠. 실눈을 뜨고서야 근접해 볼 수 있는 미세한 작은 점에 불과한 저 초록의 별.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명명한 ‘창백한 푸른 점’인 지구의 모습은 고독하나 성성한 빛을 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두 개의 심장을 지닌 듯이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저 우주의 공간. 광대무변한 저 공간 위에 고단함을 내려놓고 기대어 쉬고 싶을 때 만나야 할 책이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입니다. 안개 속 전개로 종잡을 수 없었던 제1부였습니다. 제2부에 들어서고 나서 어수선했던 내 생각에도 조금씩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지요. 급기야 읽기에 탄력이 붙은 것이죠. 삶의 길목에서 예기치 않은 어그러진 일로 참담했던 기억은 누구에나 저장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 소설의 핵심 중 한 사람(‘나’)은 경계에 있고 또 다른 이(고야스)는 해탈의 경지를 넘어서 있습니다. 그들 각자가 처한 상황의 멍에를 순리대로 풀어 정체성을 견고히 하는 구도소설로 느껴졌습니다. 이렇다고 할 만한 확실한 사람(또는 세계)이 주변에 없어 ‘생각의 공간’이 많아진 그들. 그런 두 사람의 독백이 무수하게 점철되며, 고뇌 어린 흔적으로 남겨져 우리가 엿볼 수 있듯이. 그렇게 처절하리만치 자신의 진수를 탐구해가는 그들의 모습은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걸어온 내 삶의 일부와도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을 이루지 못해 정서적인 난민으로 떠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복되는 안온한 일상에 젖어 사는 것이 ‘내’ 인생 목적이 아닐지 되짚어 볼 대목입니다. 예측 불가한 삶의 연장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하얗게 번져가는 되물음의 ‘고독’은 우리 곁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몇 가지 단서를 인용해 다가올 삶의 예시문을 툭툭 던져줄 뿐이죠.
퍼즐에 맞춰 모자이크를 이룰 일이 독자들의 몫인 것처럼. 나아가 소설의 배경인 이 ‘도시’가 예기치 않은 재난이 많던 ‘후쿠시마’를 선정할 것도, 만만치 않은 작가의 의도가 엿보이는 부분입니다. 참담한 사고로 일순간 가족을 잃어버린 그 ‘아픔’이 밴 그곳을 글의 소재로 삼은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래왔던 두 사람이 격랑에 맞서 분연히 일어설 수 있던 점은 늘 ‘지금 여기(here and now)’로 돌아와 정지된 모티브로 일관해 온 결과였습니다.
사회적 약자(솔로 노인 여성)에 속하는 나 역시 40대 중반 이후로 도발적인 삶을 살아왔습니다. 해야 할 일을 서슴없이 저질렀습니다. 오래 벼르고 별렀던 일이었습니다. 부유한 집 태생은 아니나, 그 무렵 대로변에 위치해 상가(商家)로 귀속된 작은 집 한 채를 유산 받은 계기였습니다. 홀로 남겨질 제게 날개를 달아준 어머니의 깊은 배려였죠. 그로써 그 일을 실현할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고 주저하지 않고 그 보답의 길을 열었습니다.
첫 시작은 철가방이란 공직을 내던진 일이었습니다. 부모의 유산(상당한 금액)의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 노인복지사업을 운영했으며 뒤늦게 글 쓰는 일에 매진해 안정된 길로 정착한 지금의 노년입니다. 이러기까지 사회적 차별과 편견 그리고 혐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불필요한 내 삶을 압축시키고 단순화시킨 ‘지금 여기’가 ‘득음’으로 번지며 ‘홀로’의 길에 안착한 것이죠. 이제 내게 남은 과제는 잘 죽는 일입니다.
살아 무언가에 진심으로 대했고 최선을 다했다는 기억. 그 온기만이 사후 그들 영혼의 상태에 영향을 미치게 할 것입니다. 무언가를 강하게 믿고 나아갈 수 있다면 그 길은 분명 현실 앞에 뚜렷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작가가 우리에게 던진 뜻깊은 메시지라 생각합니다.
다음 세대에나 당도하리라 미뤄 짐작했던 가상의 현실이, 성큼 다가와 채찍을 가할 시간으로 더 촘촘해졌습니다. 젊은이에 못지않은 현실의 압박을 이 늙은이도 느끼고 있어요. 이럴 때 각자 더 단단해질 정신세계로 만들어 갈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름다운 이 지구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밝은 모습을 유지하려면 흔들림 없는 대응력을 한껏 키워내야 할 테니까요.
주어진 생의 과제를 잘 숙지하고 풀어가면서, 남과의 비교함이 없이, 내게 주어진 분량만큼,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 가면 그만 아닐까요. 살아갈 일 보다 살아온 지점에 도달한 경지의 생명체만으로도 대단하지 않나 하고요. 품질 우수한 세포의 힘찬 유영의 결과로 잉태돼 세상에 태어난 이 몸, 그 이상 뭘 더 기대하겠어요. 삶이란 길가에 핀 이름 모를 풀 한 포기처럼 상황에 수긍하며 살아가는 일 외에 더 큰 의미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