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와 영원회귀

붓다와 니체가 '나'에 대해 말하는 것

by 시온

"나는 나다." 우리는 이 말을 의심 없이 반복한다. 그러나 잠깐 멈춰서 생각해보면, 그 '나'는 정말 언제나 같은 존재일까? 생각도, 취향도,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같은 이름을 쓰고 같은 몸으로 살아가지만, 그 안의 무언가는 쉼 없이 바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딘가에 변하지 않는 핵심이 있다고 믿는다. 영혼이라고 불러도 좋고, 본래의 나라고 불러도 좋다. 그 믿음이 있기에 "나는 나다"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 것이다.


바로 이 믿음에 대해 붓다는 말했다. 나는 없다고.


단, 여기서 '없다'는 것은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 변하지 않는 영혼 같은 것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의 몸은 끊임없이 바뀌고, 감정은 구름처럼 지나가고, 생각은 물결처럼 일렁인다. 그 모든 것이 한순간 만나 '나'라는 패턴을 이룰 뿐이다. 물은 끊임없이 바뀌어도 강의 이름이 남듯, '나'란 흘러가는 경험들에 붙여진 하나의 이름일 뿐, 그 안에 고정된 실체는 없다. 이것은 삶을 허무하게 보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변화야말로 존재의 본래 모습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라는 가르침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윤회(輪回)도 달리 읽힌다. 윤회는 흔히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좀 더 가깝게 당겨보면, 윤회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 분노에 사로잡히는 순간 분노라는 상태가 마음을 물들이고, 용서를 선택하는 순간 그 물듦이 씻겨 나간다. 집착이 고통을 만들고, 그 고통이 또 다른 집착을 낳는 순환. 불교가 윤회를 문제 삼는 이유는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욕망을 내려놓고 집착의 고리를 끊는 것, 그것이 해탈이다. 불교의 이상은 이 순환 밖으로 나가는 것, 더 이상 새로운 집착이 쌓이지 않는 고요한 자리에 이르는 것이다.


니체는 전혀 다른 시대와 문화에서, 그러나 놀랍도록 비슷한 질문을 붙잡았다. "만약 네 인생이 지금 이대로 끝없이 반복된다면, 너는 그 삶을 다시 선택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영원회귀다.


이 질문 앞에 서면 대부분의 사람은 주저한다. 후회와 미련이 한꺼번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니체는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다고 봤다. 영원회귀는 완벽하게 살라는 요구가 아니다. 지금 이 삶을, 고통까지도 포함해서, 무한히 반복해도 좋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충만하게 살고 있는가를 묻는 실존적 질문이다. 체념하거나 소극적으로 흘려보내지 말고, 매 순간을 온전히 긍정하라는 촉구이기도 하다. 니체는 이것을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는 말로도 표현했다. 내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심지어 고통과 실패까지도, 없애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으로 껴안는 태도다. 삶을 통제하려 하지 말고, 삶이 나에게 던지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두 사상은 흥미롭게도 같은 지점에서 출발한다. 고정된 자아는 환상이라는 것, 변화가 삶의 본질이라는 것, 그리고 과거에 묶이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거기서 길이 갈라진다. 방향이 거의 정반대다.


붓다는 말한다. 욕망의 순환에서 벗어나라. 집착을 내려놓을수록 고통도 줄어들고, 마침내 고요한 자유에 이를 수 있다고. 니체는 반대로 말한다. 이 욕망과 고통과 기쁨의 삶을 무한히 반복해도 좋을 만큼 강렬하게 살아라. 욕망을 끊는 것은 삶에서 도망치는 일이라고. 실제로 니체는 불교를 두고 삶을 부정하는 철학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같은 문제를 바라보면서도 서로를 향해 고개를 젓는 셈이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옳은가? 솔직히 말하면, 두 사상 모두를 깊이 공부한 사람도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할 질문이다. 다만 두 사상이 서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꽤 날카롭다. 불교는 묻는다. 욕망을 극대화하는 삶이 정말 자유인가, 아니면 더 정교한 집착인가? 니체는 반문한다. 욕망을 비운 고요함이 정말 충만한 삶인가, 아니면 삶의 회피인가?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다. 어쩌면 그래서 두 사상이 지금도 여전히 읽히는지 모른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 전에, 두 질문을 동시에 마음에 품고 사는 것. 그것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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