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싫어지던 어느 날, 책을 만났다

by 아키토 terrace

만화책 외의 책은 거의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직 축구소년이던 중학생 시절,

여름방학 숙제인 독서감상문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고른 책은 일본 축구 국가대표 선수의 자서전이었다.


그만큼 독서와는 거리가 먼 어린 시절이었다.


그런 내가 고등학생이 되어 동서고금의 책을 60권 넘게 읽게 되었다.

물론, 그 시작에는 분명한 계기가 있었다.


좋아하던 축구가 싫어지고,

꿈도 희망도 없이 중학교 시절을 보내던 나는

결국 나 자신까지 싫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인생은 한 번 뿐이지만, 독서를 통해 수백, 수천 개의 다른 인생을 만날 수 있다”

라는 말을 접했고, 이유 없이 책을 읽고 싶어졌다.

지금의 지루한 나와는 전혀 다른, 또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만나보고 싶었다.


단순하게.

순수하게.


그게 시작이었다.




고1 여름방학.

국어 교과서에서 미리 조사한 나는 동네 서점에서 세 작품을 한꺼번에 사 왔다.


셰익스피어의 불후의 비극 『햄릿』

세계 문학사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괴테의 『파우스트』

인간애의 이야기인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만화책밖에 없던 내 책장에 갑자기 등장한 위엄 넘치는 신입들.

만화책들의 익살스러운 표정도 어딘가 당황한 듯 보였다.


당시의 나에게는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보다,

이런 책들을 읽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더 큰 기쁨이었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책은 시대를 넘어 전 세계 사람들이 읽어온 명작이다.

그래서 읽는 것만으로도, 이런 나라도 세계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햄릿』,『파우스트』,『레 미제라블』순으로 읽어 나갔는데,

특히 『레 미제라블』을 읽었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위고의 격조 높은 문체와 장 발장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삶에 가슴이 벅차올랐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책이 이렇게까지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무렵 학교에서 1박 2일간의 스키 합숙이 있었는데, 국어 시간에 합숙 소감문을 제출하라는 과제가 나왔다.

한 달 걸쳐 대장 편 『레 미제라블』을 막 읽어낸 나는 하얀 원고지를 마주하자 이상하게 마음이 들떴다.

제목을 쓰는 순간부터 펜이 멈추지 않았다.

마치 내가 위고라도 된 듯이.


그리고 맞이한 제출일.

다들 원고지 2~3장 정도를 내는 가운데, 나는 37장의 두툼한 소감문을 제출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런 자기만족 글을 읽어야 했던 국어 선생님은 꽤나 곤란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경험은 “글 쓰는 게 이렇게 재미있구나!”라고 느끼게 해 준 큰 계기였다.


그렇게 독서의 즐거움에 눈뜬 나였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책이 너무 재미있는 나머지, 관심 없는 수학이나 화학 수업 시간에도 소설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당당하게.


보다 못한 수학 선생님이

“야, 지금은 수학 시간이야”라고 주의를 주면,

“제 인생에 수학은 필요 없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해놓고는 시험에서 5점을 받았다.

(물론 그 후 깊이 반성하고 모든 수업에 집중하게 되었지만...)


그리고 시를 쓰는 것이 새로운 취미가 되었고, 고등학교 시절에만 130편이 넘는 시를 썼다.




그러던 나에게 놓쳐서는 안 될 순간이 찾아왔다.


고1 겨울,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는 밀레니엄의 순간이었다.

1999년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저녁,

집 베란다에 나가 해넘이를 보며 「1999~EPILOGUE~」라는 시를 썼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다시 베란다로 나가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노트와 펜을 준비한 후,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다.

천 년에 한 번뿐인 이 순간을 시를 쓰며 맞이하자는 계획이었다.

말 그대로 천재일우.

시끌벅적한 연말의 주택가 한편 베란다에서 혼자 신성한 기분에 젖어,

「1999-2000~MILLENNIUM~」이라는 시를 쓰며 천 년의 해를 넘겼다.


하지만 나의 밤은 끝나지 않았다.


몇 시간 후면 2000년대 첫 해돋이가 온다.

이번에는 천 년의 막을 여는 해돋이를 보며 시를 쓰는 계획이었다.

제목은 「2000~PROLOGUE~」로 이미 정해두었다.


천 년의 마지막 해넘이부터 이어지는 시 3부작.

나는 그대로 베란다에 남아, 추위에 떨면서 밤하늘을 계속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늘이 파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해가 떠오른다.

급히 펜을 잡았다.

하지만 손이 너무 시려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겨우 써 내려간 첫 문장은 이랬다.


얼어 죽을 것 같았다

(凍えそうだった)


얼마나 추웠을까.

신성한 2000년대 첫 해돋이 앞에서

내가 처음 느낀 것은 ‘신성함’보다 ‘얼어붙을 듯한 추위’였다.


그때 잠에서 깬 어머니가 베란다 문을 열고 놀라셨다.


“아직도 거기 있었어!? 감기 걸리니까 얼른 들어와! 정말…”


그렇게 신성한 밤은 끝났고,

예상대로 2000년 첫날을 감기로 앓아누우며 맞이했다.


하지만,

이렇게 축구소년에서 문학청년으로 변해버린 나는,


나 혼자 만의 세계를 넘어

조금씩 바깥세상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고등학생 시절에 혼자 제작한 나 만의 시집(왼쪽), 처음 구입한 세계문학 세 작품과 좋아하게 된 위고 작품들(오른쪽)
이전 02화또 다른 내가 사라지던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