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년이 침대에 엎드린 채, 미동도 않고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소년의 드르렁거리는 콧소리가 방 안을 울릴 정도로 거세고 규칙적이다.
2월의 아침.
오늘따라 거세고 차가운 바람은 결국, 제대로 닫지 못한 창문을 쾅- 소리 나게 열어재꼈다.
큰 소리에 소년이 몸을 들썩이더니, 언제 감았는지 모를 떡지다 못해 굳어버린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박박 긁어댔다.
이쯤 되면 깨어날 법했지만 소년은 손가락을 머리칼에 박아둔 채, 다시금 규칙적인 콧소리를 냈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에 취한 소년의 이름은 에런 시엔스,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은밀한 세계의 별 볼일 없는 마법사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에르테아의 주민이라면 적어도 한 번쯤은 그의 이름을 어딘가에서 보고 들어봤을 정도로 소년의 명성은 꽤 자자하다.
그 이유는 궁금해할 것도 없다. 1분, 아니 그것도 너무 많다. 그냥 보는 순간 자연히 깨닫게 될 것이다. 에런 시엔스는 대중성과 보편성을 고루 겸비한 최악의 깡통마법사이자 모두의 기피대상 1 호니 말이다.
어젯밤, 에런은 기숙사에 들어오자마자 망토도 벗지 못한 채 침대에 바로 엎어졌다.
침대에 엎드린 채 ‘오늘은 씻어볼까?’ 생각했지만 5초도 되지 않아 곯아떨어졌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에런이 몸을 잘 씻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잠이 너무 많아서일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꽤 게으르다는 것이고, 다음 이유로는 *추위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에런의 목욕 횟수가 추워질수록 줄어든다는 꽤 그럴싸한 연구 결과가 교내신문에 실린 적 있음. 미스터리 연구동아리 일동은 이 연구를 위해 한동안 에런을 따라다닌 후 부작용으로 약 두 달간 음식섭취 시 헛구역질을 했음.)
하지만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앞서 말한 세 가지의 이유는 에런 스스로가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씻지 않는 51가지 이유 중 일부라는 점이다.
여기서 돼먹지 않은 변명까지 포함한다면 *100가지도 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에런은 씻지 않는 것에 나름 진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필수교육과정 2학년 때의 일이다. 푸리선생님의 핀잔에 에런이 재미없는 약초학 수업이 끝날 때까지 이유와 변명을 늘어놓았는데 한 학생이 대충 세어본 것만 해도 100가지가 넘었다고 함. 그 일 이후로 그 누구도 에런에게 씻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음.)
그러나 아직은 차가운 2월의 아침 바람에도 이불 없이 잠만 잘 자는 걸 보면 추위 때문이라는 세 번째 이유는 그저 그런 변명일 것이다.
잠시 후 활짝 열린 창문으로 매서운 바람이 들이닥치자 에런의 더러운 망토가 펄럭이며 홱 들쳐졌다.
그러자 에런이 다채롭게 껴입은 수많은 옷들이 탁한 빛깔을 내뿜으며 존재를 알렸다.
도대체 몇 겹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잔뜩 껴입은 탓에 마른 체격이 분명함에도 몹시 둔해 보였지만 그 덕분에, 쌀쌀한 아침 바람 정도로는 절대 에런을 떨게 할 수 없을 테니 씻지 않는 세 번째 이유는 어느 정도 납득해 주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겠다.
탁탁 탁탁-
기숙사 복도에 누군가의 다급한 발소리가 울렸다.
발걸음은 복도의 맨 끝, 에런이 곤히 잠든 방을 향해 빠르게 다가가고 있었다.
“정말 돌아버리겠군, 돌아버리겠어!”
욕지거리와 함께 험악한 인상을 자랑하는 그의 정체는 기숙사의 아침과 밤을 책임지는 아르테 마법학교의 기숙사 사감, 브루노였다.
나이가 들어 약간 구부정한 허리와 주름진 얼굴을 보면 노인이 분명했지만 걸음걸이만큼은 학생들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만큼 매우 빠르고 가벼웠다.
“도대체 내가 왜 오늘까지 저놈 알람노릇을 자처하고 있냔 말이다! 망할!”
그의 분노 어린 목소리에 마침 복도로 나오던 학생들이 기숙사 문을 쾅 닫고 몸을 숨겼다.
“네 놈들! 문 살살 안 닫아? 기숙사 문에 흠집이라도 나봐, 하루종일 창문에 거꾸로 매달아 놓을 테다!”
그의 발걸음이 멀어지자, 학생들은 안도하며 슬그머니 문을 열었다.
“도대체 오늘은 왜 기분이 안 좋은 거야?”
“구부정이가 하루 이틀 저러는 것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됐고, 아침이나 먹으러 가자.”
어느 기숙사에나 사감들을 향한 애정 어린 별명이 있듯, 노쇠한 그에게도 학생들이 지어준 아주 찰떡같은 별명이 있었는데 바로 “구부정이 좀비”와 “창백한 유령”이다.
이유라면 생각보다 단순했다.
브루노는 기숙사의 규칙을 어기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이유나 사정이 있더라도 절대 봐주는 법이 없는데 잘못을 해서 도망치는 학생이 있다면 구부정한 몸뚱이와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끈질기게 쫓아와 잡아내는 꼴이 꼭 좀비 같았고, 밤늦은 시간 몰래 기숙사 밖으로 탈출하려는 학생들의 비밀루트는 물론, 작은 개구멍까지도 모조리 파악해 잠복해 있다가 허여멀건한 얼굴로 나타나 학생들의 심장에 강력한 펌프질을 해대는 그의 특기는 창백한 유령이라는 별명이 붙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기숙사 학생들이 노쇠한 그를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테아의 추종자로서 어둠의 힘을 끌어와 금지된 마법을 사용한다는 소문 때문이다.
축복의 힘을 받아 마법을 사용하는 일반적인 마법사들과는 달리, 축복을 받지 못해 매번 비싼 에르석을 구매해 마법을 부려야 하는 저주받은 마법사들에게 늘 따라오는 오명 같은 것이기에 알만한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아직 멋모르는 학생들에겐 들려오는 말 한마디가 굉장한 공포였다.
공용 휴게실이 가장 한산하다고 할 수 있는 아르테마법학교의 겨울방학기간, 학생들이 슬쩍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수군댔다.
“오늘 구부정이가 특히 기분이 안 좋아. 저길 좀봐, 다리를 전혀 절뚝대지 않고 걸음이 매우 빠르지. 이런 날은 정말 특별히 조심해야 돼”
“맞아. 저런 날은 꼭 말 안 듣는 학생 하나를 납치해 자기 방에 감금해 놓고 온갖 고문과 실험을 한 다며? 그런데 아무도 그의 방을 아는 사람이 없어. 너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끔찍하게도 브루노의 방에 끌려간 사람 중 그 누구도 살아 나온 사람이 없다는 뜻이야. 집에 가고 싶어. 왜 우리 엄마 아빠는 나만 빼고 여행을 간 걸까?”
“그래도 넌 다음 주면 집에 가잖아. 난 이번 겨울 방학 동안 꼼짝없이 여기 갇혀 있어야 돼. 엄마가 나에게 쓰려고 숨겨둔 종이인형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거든. 당분간 집에 발도 못 들일걸? 그 구하기 어려운걸 왜 태웠냐며 등짝을 맞고 쫓겨나서 어쩔 수 없이 돌아온 거야. 내 등이 괜찮은지 봐줄래?”
“그 요즘 엄마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급하다급해! 저주 종이인형(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연구원이 발명한 통신용 마법용품)을 말하는 거야? 차라리 그 종이인형에게 매일 당하더라도 집이 낫지. 왜 그랬어?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아르테 마법학교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은 브루노래. 너네 브루노가 마법 사용하는 거 본적 있어? 그는 애초에 저주받은 마법사(축복을 받지 못한 마법사)야. 그래서 테아의 추종자가 되겠다는 서약을 하고 금지된 힘을 끌어와 마법을 사용하는데 그 마법은 하나같이 아주 끔찍하고 잔인한 데다가…….”
“그러니까 네 말은 브루노가 반 에르테아를 꾀하는 테아의 추종자 중 한 사람이라는 거야?”
“쉿, 조용히 해. 브루노는 귀가 밝아서 멀리에서도 전부 듣는다는 거 몰라? 우리에게 끔찍한 저주를 걸면 어떡해!”
“교장선생님은 어째서 저런 위험한 사람을 기숙사 사감으로 둔 거지? 대단한 분이라는 건 알겠는데 너무 엉뚱해서 이해하지 못하겠어!”
브루노는 짜증스럽게 귀를 후비적거렸다. 이대로 멈춰 그들에게 겁이라도 줄까 생각했지만 고개를 내저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브루노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관한 이상한 소문이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딴 소문에 신경 쓸 여유 따위 없을뿐더러 오히려 마주치는 학생들마다 지레 겁을 먹고 알아서 피해주니 코브라국(에르테아의 안전을 위해 광범위한 활동을 수행하는 기관)에서 자신을 잡아 조사를 시작하지 않는 한, 소문에 대한 진위를 밝힐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보단 학생들을 끔찍이 싫어하는 브루노가 100년째, 기숙사 사감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르테 마법학교의 미스터리 중 하나에 올랐다는 점이 오히려 더 거슬렸다.
“벌써 50년째 이어지고 있는 미스터리 연구동아리…… 쓸데없이 자리만 축내는 그놈들의 연구실을 폭파시켜 버리든가 해야지. 아니, 그전에 내가 이 더러운 일을 때려치우면 되잖아! 둘 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 떠드는 걸 보니 돌아버린 게 틀림없군. 그래, 그러니까 아침부터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있지!”
브루노가 이를 부득 갈았다.
역시 심신안정을 위해 가장 필요한 건 복도 맨 끝방, 세상모르게 처자고 있을 골칫거리 처리가 우선이었다.
브루노는 도끼눈을 뜬 채, 굳게 닫혀 있는 방문을 노려보았다.
급하게 걸어온 것 치고 그는 쉽게 문을 열지 못했다. 그렇게 30분이 더 흘러서야, 결심이 선 듯 그는 비장하게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아침을 망쳐버린 원흉, 이 문제를 끝내고 못 다 누린 휴식을 마음껏 누릴 것이다.
브루노는 이를 악물고 방문을 세게 열어젖혔다. 잠겨 있지 않은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혔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밝은 햇살이 브루노의 눈을 따갑게 비추었지만, 그는 잔뜩 찡그리면서도 익숙하게 침대로 시선을 던졌다.
“그럼, 그렇지.”
브루노는 작게 중얼거리더니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 머저리 같은 녀석아, 어서 일어나!”
브루노의 호통에 에런의 기숙사 방, 창문에 앉아 있던 얼음새가 놀라 날아갔다.
하지만 정작, 침대 위 소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브루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가 늘게 떴다. 그리고 동시에 힘없이 축 쳐진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이렇게 나와 줘야 나도 네 놈을 깨울맛이 나지.”
브루노는 바닥에 널브러진 엄청난 양의 종이들을 발로 걷어내며 침대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에런의 두꺼운 망토와 옷들을 양손의 검지와 엄지로 한 겹 한 겹 정성스레 걷어올렸다.
“13겹, 두 달 전과 똑같군. 그 말은…….”
더럽다는 듯, 잠시 손가락들을 쳐다보던 그는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코 끝에 갖다대었다.
“우욱, 똥이라도 묻힌 거냐?” 그는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걸 참아내기 위해 잠시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잠시 후, 조금 진정이 된 브루노가 엎어져 자고 있는 에런의 엉덩이를 뜨겁게 바라보았다.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두 손에 침을 뱉는 시늉을 하더니 마구 비벼댔다. 손의 열기가 올라가는 만큼 그의 입꼬리가 빠르게 승천했다.
그렇게 만족할 만큼 손이 달궈지자 이번에는 양손을 들어 올려 섬세히 각도를 조절했다.
그 모습이 우습게도 꽤나 전문적 이어 보였다.
“두 달 만에 하려니 쉽지 않군.”
하지만 금세 감을 잡은 브루노는 자신이 원하는 각도가 나오자 히죽 웃어 보였다.
“그래, 바로 이거지, 이거야! 이 머저리야, 일어날 시간이다!” 브루노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온 힘을 다해 에런의 엉덩이를 내리쳤다.
그 순간, 에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으으, 으아아아아악!”
한 소년의 처절하고도 날카로운 비명이 방안을 울렸다.